66~69
2012.03.03 22:37

1966년 RRC의 탄생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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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제네바에 본부를 둔 WSCF (World Student Christian Federation - 세계기독학생연맹)는 "Academic한 공동체안의 크리스쳔들은 어떤 삶의 양식을 가지고 존재할것인가?" 라는 명제를 가지고 매년 중점사업을 펼쳐가던중, 66년도는 다음 4가지 Issue를 채택한다.

 

   1. 학문
   2. 결혼
   3. 군 입대
   4. 여가선용

 

  당시에는 대학생활 중에 여가를 즐긴다는 개념같은것이 전무한 상태이었고, 또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런것을 즐길 정신적, 물질적 여유가 없었던 관계로 주점에서 탁주를 마시며 노래하는 정도가 그 대표적 형태이었다. 당시 외부의 레크리에이션 리더였던 이경열선생(이대 독문학부)과 더불어 활동하던 한기근, 노정선선배는 상기 4번항목을 즉, 여가선용에 있어서의 현실적인 여건에 대해 유감스럽게 여겨 한양순교수 (체육학), 성내운교수 (당시 학생처장)등과 협의하여 '캠퍼스 내에 건전한 놀이문화를 접목시킨다'는 취지 아래 다음과 같은 행사를 계획하게 되었다.

 

  66년 추석이 다가오자, 많은 지방학생들이 귀향치 못함을 알고, 그들을 위로할 목적으로 떡잔치와 Folk Dance Festival이 상기멤버들에 의하여 준비되고 치러지게 된 것이다. (이 최초의 봉사사업은 당시 야구장-지금의 중앙도서관 자리-에서 열렸음) 많은 지방학생들과 준비하고 돕던 서울학생들이 서로 어울려 참으로 뜻 있는 행사가 되었다. 여기에서 용기와 보람을 얻어 자연스럽게 조직된 것이 바로 본 RRC 모임이다.

 

  최초의 동아리방은 신과대학 학생회장실을 사용하였고 이후 시끄럽다는 (노래소리에) 이유로 핀슨홀(지금의 윤동주박물관)로 이전되었다. 더불어 이 새로운 문화의 시도는 노정선선배의 작은논문 <각 대학의 축제비교>로 대학가에 제안되었고 이어 조선일보에서 이를 게재하여 전국적으로 새로운 놀이문화는 RRC를 기점으로 뻗어가게 된다.

 

  67년은 모든 아이디어가 동시에 시도되는 해이었고 그 모든 시도들은 우리의 전통과 상징이 되었다. 그 해 봄 무악축전에서 제시된 Little Olympic, 강강수월래, 필리핀 뱀부댄스, 그리고 상대축제의 풍물패 등장 등을 주도하면서 행사의 대미격인 문과대앞에서의 전교생 포크댄스 페스티벌은 시범 여학생의 과감한 시도로 당시 박대선 총장님을 파트너삼아 시작되자 그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그 해 여름, 캠퍼스의 낭만은 해변으로 이어져, 북평 해수욕장에서 타학교 학생까지 다수 참석(120여명), 대학가의 한 획으로 자리매김 하면서 지금까지 그 명맥을 부단히 이어져 오고 있다.

 

  그 후 많은 지도자들이 배출되어 대학가의 여러가지 모임을 이끌어 왔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회단체에서 공헌하고 있다. 특기할 것은 67년 당시 군정당국은 여러가지 항목(건전도, 자립도 등)을 놓고 검토한 끝에 본교에서 가장 우수한 동아리 둘을 선발했던바, 하나가 SCA였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RRC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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