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79
2012.03.03 23:14

1977년의 R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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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7년 1학기 임원단과 회원들

 

  1977년 1학기의 RRC 임원단은 12기 멤버들이었고, 이종창(금속) 회원이 1977년 1학기의 회장을 맡았다. 그러나, 당시 active한 12기의 인원이 많지 않았고 선우광범(금속) 회원이 ROTC에 들어가는 관계로 총무 선정이 어려웠던 12기는 13기에서 총무를 선정하기로 하고, 송영관(기계)회원을 총무로 임명하였다.

 

  이리하여 구성된 임원단은 회장 이종창(12,금속), 부회장 강혜영(12,간호), 총무 송영관(13,기계), 회계 이은미(12,식생), 서기 백미숙(12,도서관), 기획부장 이세종(12,금속), 연구부장 선우광범(12,금속), 관리부장 황경구(12,체교) 등으로 이루어졌다.

 

  1976년부터 신설된 연구부 산하의 부장들은 13기 회원들로 구성되었는데, song부 최용석(신학), game부 지승룡(신학), FD부 한창수(생화학), Decoration부 조용호(신학)로 구성되었고, 이외에도 백치옥(화공), 김현철(기계), 김정삼(기계), 조수현(신학), 박인자(의생), 한혜경(의생), 정태영(식생), 이현영(식생), 조창숙(식생), 이성임(주생), 김은덕(주생) 등의 2학년 회원들이 활약하였다.

 

  1977년 서클룸의 왕고참은 군에서 제대한 윤경혁 회원(6기, 전기)이 있었고, 이외에10기 양승주(기계), 11기 이동학(체교), 김경(경영), 함현권(기계), 최종철(금속), 신용운(의대), 박혜란(아동), 석은영(의생), 최귀숙(식생)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서클룸에 나와 후배들을 도와주었다.

 

  특히 6기였던 윤경혁 회원은 프로그램 진행의 고수로서, 졸업반에 있어 바쁜 가운데서도 많은 후배들을 지도하였는데, 개인적으로 프로그램 의뢰를 받아 나갈 때에는 후배들을 함께 데리고 가서 견학하도록 하였으며, 심지어 8년 차이가 나는 1학년 회원도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이러한 프로그램이 끝나면 참석했던 사람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1학년 한 명일지라도) 자신이 진행한 프로그램에 대한 평을 함께 함으로써 그 참석자들이 견문을 넓힐 수 있도록 힘썼다.

 

  10기 양승주 회원은 예쁜 글씨체와 그림 등으로 포스터, 엽서 등을 멋지게 장식하는 것을 RRC에 처음 도입하였으며, 1977년에는 그 열기가 번져, 너도 나도 서클룸에서 정기집회 포스터를 그려보고자 하였다. 당시 RRC의 포스터는 양승주 회원이 입회한 1973년부터 노랑 바탕에 그림을 그렸는데, 다른 포스터들이 모두 흰 바탕에 딱딱한 필체로 쓴 것에 비해, 노랑 바탕에 재미있는 그림과 글씨가 조화를 이룬 RRC의 포스터는 항상 눈에 띄었다.

 

  또한 11기 이동학 회원은 8기 최정훈 회원의 뒤를 이어 서클 바람잡이 역할을 수행하며, 술, 운동 등을 통해 후배들과의 융화에 힘썼다. 그가 재학시절 개척한 Fedra는 RRC의 오랜 단골로 자리잡았다.

 

  1977년 서클의 지도교수로는 1기 회원으로서 RRC의 창립멤버 3인방 중 1명이었던 노정선 목사님이었는데, 당시 신과대 교수로서 재직하고 계셨다.
 

 

2. 신입생 환영회 (3/26) 
 
  1977년 3월 입회한 14기 회원들은 최영상(경제), 문경택(경제), 최세환(요업), 김동운(요업), 박종언(전기), 이종재(전기), 박찬규(전기), 정원찬(화공), 강원영(화공), 이상노(화공), 유형종(경영), 조성표(경영), 김은향(아동), 이경애(아동) 등이 있었다. 3월 이후에도 계속 회원이 늘어나 이종걸(전기), 송재훈(전기), 박준환(전기), 최병갑(요업), 김종민(요업), 고성훈(의예), 이만종(응통), 장영순(의생), 손덕연(의예) 등의 회원이 입회하였고, 1978년에도 최항식(전자), 이홍구(건축), 한은경(중문) 회원들이 들어왔다.

 

  14기 회원들은 인원이 많고 열성적이어서 선배들의 총애와 기대를 많이 받게 되었고, 3,4학년과의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며 선배들로부터 여러 가지 배울 기회를 많이 얻었다.

 

  신입생환영회는 3월 26일 열렸는데, 이날은 축구 한일전이 열리는 날이어서, 진행을 맡았던 윤경혁 회원이 프로그램을 중간에 끊었다가 축구 끝나고 다시 진행을 하는 기묘한 진행을 하였다.

  

  행사가 끝난 후에는 Fedra에서 뒷풀이가 이어졌고, 14기 회원들은 8기 최정훈, 11기 이동학 회원을 위시한 선배들과 술을 마실 기회를 처음 가지게 되었다.
 

 
3. 춘계 수양회 (4/2 ~ 4/3) 
 
  1977년의 춘계수양회는 일영에서 열렸다.

 

  4개의 조로 편성되었고, 각 조의 조장은 13기 회원들이 맡았는데, 지승룡, 조용호, 한창수, 박인자 이상 4명이 조장을 맡았다. 조 이름은 각각 사랑해조(조장 지승룡), 뿅조(조장 조용호), ???조 (조장 한창수), 끝내조(조장 박인자)로 정하였다.

 

  이 날 열린 촌극대회의 하일라이트는 번외로 열린 후발대의 촌극이었다. 본대와 함께 참가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최정훈(8기), 양승주(10기), 함현권(11기), 선우광범(12기), 한창수(13기), 한혜경(13기) 회원들이 늦게 도착하면서 준비한 것으로서, 당시 사회 문제였던 일본 조총련계 교포 모국 방문에 얽힌 민족 분단의 비극 (극의 후반부에서 부녀간의 이별로 연결됨)을 주제로 한 내용이었다. 이 촌극은 후발대로 도착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관객들이 모르도록 후발대원들이 숨어 있는 상태에서 시작되어, 극이 진행되며 한 사람 두 사람 등장하여 신선감을 주는 독특한 플롯을 가졌고, 스토리의 줄기만 설정한 가운데, 대화 내용들은 연기자의 재치와 순발력에 의해 즉흥적으로 결정되는 것이었다. 최정훈 회원의 아이디어를 극화한 이 내용은 촌극대회를 처음 겪어본 14기 회원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는 작품이었다.

 

  프로그램이 끝난 후, 술자리가 이어졌으며, 밤을 샌 몇몇 회원들은 새벽에 6기 윤경혁 회원의 인솔로 앞산에 올라가기도 하였다.
 
 
4. 게임 파티 (5/14) 
 
  1977년의 게임파티 준비는 대대적인 도구제작을 담당한 도구제작팀 (팀장 양승주, 함현권), 기존의 RRC상징인 오뚜기를 보수하고, 또 하나의 오뚜기를 더 만드는 오뚜기제작팀 (팀장 최종철, 이동학), 행사장 장식을 준비하는 데코레이션 팀 (팀장 조용호), 그리고 CM송 제작팀 (팀장 최용석)과 섭외팀 (팀장 송영관)으로 나뉘어 일을 하였다.

 

  이들은 서클 룸외에 대강당의 룸을 임시로 하나 더 얻어 도구 제작실 및 창고로 활용하였으며, 오뚜기 제작은 대강당 옆 복도, 그리고 CM송 녹음은 서클 룸에서 작업이 이루어졌다. 작업은 4학년 고참들(양승주, 함현권)이 솔선수범하여 직접 도구를 제작하고 1,2학년 회원들이 옆에서 거들며 배우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오뚜기 제작은 전통적인 통통한 오뚜기 외에 키가 큰 오뚜기를 제작하였는데, 너무 키가 큰 관계로 세워 둘 수만 있을 뿐, 사람이 들어가 메고 다닐 수가 없어 행사장 및 티켓 판매대에서 장식품으로 활용하였다. 통통한 오뚜기는 여러 번 겉모습이 바뀌었고, 이름도 눈사람으로 바뀌었지만, 2000년 2월 현재 아직도 RRC를 지키고 있어 RRC의 역사를 가장 오랫동안 현장에서 목격한 역사의 산 증인으로 남아있다.

 

  CM송 녹음은 8기 최정훈 회원 및 14기 정원찬 회원이 가사를 바꾸어온 내용을 녹음하는 것으로서, 전 회원이 모인 가운데 서클 룸에서 song부장 최용석 회원의 리드에 따라 이루어졌다. 게임파티 전날에는 데코레이션 용 풍선 부는 일이 이루어졌는데, 회원들이 밤늦게까지 남아 입이 부르트도록 풍선을 불기도 하였다.

 

  게임파티는 학생회관 지하 학생식당에서 이루어졌고, 많은 커플들이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RRC 회원들은 각 게임을 하나씩 맡아 진행을 하는 역할을 수행하였고, 이로 인하여 회원들은 축제의 다른 행사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파트너를 데려온 회원들은 파트너와 함께 게임파티 진행을 맡아 애꿎은 파트너들은 일하러 축제에 온 격이 되었다.
 
 

5. Recreation Leadership Training

 

  하기캠프가 시작되기 전인 6월말에서 7월초까지 청경관에서 RRC Leadership Training을 가졌다. 이는 하기캠프에서 조장을 맡게 될 1학년 회원들을 주 대상으로 한 것으로서, 당시 프로그램 진행 분야의 고수인 6기 윤경혁 회원이 주도하여 조장으로서 필요한 sing along 진행능력, game 진행 및 folk dance 능력 등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즉, 많은 사람들앞에서 사회를 보는 능력이 아니고, 자기 조원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능력을 심어 준 것이었다.

 

  이러한 Leadership Training은 1978년 이후에는 시행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1978년부터 2학년이 조장을 맡았고, 1학년들은 2학년 조장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Leadership을 배양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6. 하기 캠프 (7/18 ~7/23)

 
  77년 하기캠프는 70년대 중반에 RRC가 개발하여 계속 캠프장으로 활용하던 학암포에서 열렸다. 캠프본부는 캠프장 이종창(12기), 부캠프장 및 생활부장 강혜영(12기), 총무 송영관(13기), 프로그램부장 윤경혁(6기), 야영장 양승주(10기), 물품관리 최종철(11기) 등으로 이루어졌다.

 

  8개조로 편성된 각 조는 1학년인 14기의 조장들에 의하여 운영되었는데, 새조(박종언), 식조(이종재), 약조(이종걸), 어조(최병갑), 풀조(이만종), 빵조(강원영), 차조(김종민), 옷조(조성표) 등이 그 이름이었고, 각 조는 대략 9~10명의 인원들로 구성되었다.

 

  캠프의 밤 프로그램은 월요일 '코이노니아의 밤', 화요일에는 '가면무도회', 수요일에는 '전위예술의 밤', 목요일 '인디언 캠프 나이트', 금요일 '너와나 그리고 학암포' 등이었고 낮 프로그램은 'Little Olympic' 이 오전, 오후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이 외에 저녁 프로그램에서는 화, 수, 목, 금 마다 2개조 씩 촌극을 준비하여 발표하도록 하였다.

 

  화요일의 가면무도회에서는 캠퍼들이 준비한 가면들이 땀에 찢어져 그 효과가 크게 나타나지 않은 단점이 있었고, 수요일의 전위예술의 밤은 캠퍼들의 역량이 전위예술을 표방하기에 크게 모자라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또한, 화~금요일 까지 각 조별로 촌극을 준비하게 한 내용도 수,목요일에 해당된 조는 준비할 것이 두 가지가 되어 힘들었던 것도 지적이 되었다. 그러나, 다른 프로그램들은 모두 원활히 진행되었다.

 

  캠프화이어는 송영관(13)회원이 석유를 입에 물고 불꽃을 뿜는 방식으로 점화되어 캠퍼들의 갈채를 받았으며, 이 캠프화이어 주변을 돌며 polka춤을 추던 김정삼 회원이 발을 잘못 디뎌 발을 데는 일도 있었다.

 

  1977년 하기캠프를 떠나기 전 10기 양승주 회원으로부터 "1학년 여자 회원들을 한번씩 물 먹이겠다"는 얘기를 직접 들은 14기 정원찬 회원은 캠프 떠나기 전 캠프장으로 편지를 보내어 '1학년 여자 회원들은 승주형을 조심하라'는 내용을 전했다. 이 편지는 캠프 기간 중 캠프장에 도착되었는데, 모든 여자 캠퍼들은 양승주 회원들을 보면 경계하며 멀리 도망가는 일이 생겨 웃음거리가 되었다. 
 

 

7. 1977년 2학기 임원단과 회원들

 
   하기캠프를 마치고 9월에 들어서면서 12기 임원단의 임기가 만료되고, 13기 회원들이 임원단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1977년 1학기부터 남자 회원들의 서클룸 출입이 크게 줄어든 13기로서는 임원단 구성이 힘들었다.

 

  몇 차례의 밀고 당기는 회의를 거쳐, 결성된 13기 임원단은 회장 최용석(신학), 부회장 한혜경(의생), 총무 조용호(신학), 회계 김은덕(주생), 서기 이성임(주생), 기획부장 송영관(기계), 연구부장 백치옥(화공), 관리부장 김정삼(기계)이었다.

 

  또한 연구부 산하의 14기 부장들로는 song부장 최세환(요업), game부장 박종언(전기), FD부장 정원찬(화공), Decoration 부장 조성표(경영) 등이 선발되었다.

 

 

8. R-Day Party (9/5)

 

  서클 탄생 11주년을 기념하는 R-day Party가 9월 5일 청송대에서 야외 프로그램으로 개최되었다. 많은 선후배들이 모여 서클의 생일을 축하하는 기회를 가졌다. 1977년 까지는 R-day Party가 전통적인 RRC 정기집회 요일인 월요일에 개최되었는데, 선배들의 참여가 어렵다는 의견이 개진되었다. 이리하여 1978년부터는 R-day Party를 토요일에 개최하게 된다.

 

  새로운 13기 임원단이 선후배들에게 인사를 하고, 새로 연구부 산하의 부장들을 맡은 14기 회원들이 진행을 맡았다. 이 때는 Folk Dance 외에 Social Dance 시간을 두어 Waltz와 Polka 춤을 추었다. 그러나, 야외에서 Waltz나 Polka는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었다.

  
 

9. 추계 수양회 (10/22 ~ 10/23)

 

 
  1977년에도 추계수양회가 있었다. 본부는 회장 최용석(13), 총무 조용호(13)로 이루어졌고, 14기 회원들 4명이 조장을 맡았다. 조장은 당시 서클에 열심히 나오지 않는다고 임원단에서 판단한 박찬규, 박준환 등 14기 회원들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추계수양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그 때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심지어 조장을 맡았던 사람에게 '네가 조장 했었잖아?'라고 물어도 '나도 갔었니?'라고 대답할 정도. 장소는 용문수련관이었다는 추측이 가장 유력하다.

 

<추후 조사 후 보완 예정>

 

 

10. 동계 봉사 (1978/ 1/22 ~ 1/28)

 
  1978년 1월의 동계봉사는 인천 시내에 있는 계명원이라는 고아원에서 열렸다. 봉사단장에 최용석(13), 부단장에 한혜경(13), 총무 조용호(13)의 3명으로 이루어진 본부와, 이종재(14), 정원찬(14), 김은향(14) 등 3명의 1학년 회원, 그리고 이동학(11), 선우광범(12), 신종섭(12), 이성임(13) 회원들이 첫날부터 참여하였고, 중간부터 송영관(13), 박종언(14), 최영상(14), 이경애(14) 회원들이 합류하였다.

 

  지도교수님이 참가하지 못하신 대신 지도교사(?)로 참가한 이상복(8기) 회원은 당시 중학교 교사로서 매일 저녁 평가회 때마다 봉사 일정의 프로그램의 방향 설정에 대해 금 같은 조언을 해 주었다. 이상복 회원은 8기 회장을 역임하였고, 1976년 1월 11기 임원단이 활동할 당시, 동계봉사(춘당리)를 처음 제안, 도입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78년 1월의 동계봉사는 멍멍반(정원찬), 꼬꼬반(선우광범,김은향), 꿀꿀반(신종섭), 음메반(이종재), 야옹반(이동학)으로 나뉘어 이루어졌는데, 봉사 초반에 1학년인 14기 회원들의 참여도가 낮아 3, 4학년 들도 담임선생님으로 참가할 수밖에 없었다. 교육, 레크리에이션, 체육등을 중심으로 한 낮 프로그램과, 코이노니아, 합창대회, 촌극대회 등의 밤 프로그램이 있었다.

 

  매일 프로그램이 끝나면 평가회가 열렸고, 이 평가회에서는 원생들에게 좀더 많은 것을 베풀고자 하는 1학년 회원들과 이를 적절하게 통제해야 하는 임원단과의 마찰이 많이 있었다. 따라서 평가회는 새벽 2,3시까지 계속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평가회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 때면 12기 신종섭 회원이 클래식 기타를 연주해 주었고, 이 연주를 들으며 봉사대원들은 포근한 잠 속에 빠져 들어갔다.

 

  이렇게 빡빡한 일정 속에서 일을 하고 밤에도 늦게까지 평가회를 하다보니 아침 기상 시간에 봉사단원들을 깨우는 것도 큰 일이었다. 여기에서 사용된 방법은 슬리핑백 두들기기였다.당시 많은 사람들이 슬리핑백을 가져가 그 속에서 잠을 잤고, 고아원에서 제공한 보리밥을 며칠 먹다보면 밤새 슬리핑백 속에 오염된 기체가 생성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슬리핑백을 툭툭 두드리면 그 기체가 얼굴로 몰려,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방법은 동계봉사 초창기부터 RRC의 봉사단원 기상 방법처럼 계속 전해져 내려왔다.

 

  또한 1977년 동계봉사는 그동안 서클룸에 많이 나타나지 않았던 14기 이종재 회원의 입담이 대 히트를 친 행사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이어지는 이종재 회원의 재담은 끝이 없었다. 이를 계기로 이종재 회원은 졸업을 앞둔 11기 이동학 회원에 의해 서클 공식 바람잡이 직함을 이어받게 된다. 
 
 

11. 1977년에 있었던 각종 사건들

 
▶ YMCA, YWCA ◀

 

  1977년 RRC에서는 song, game, folk dance에 대한 자료 수집과 이들 분야의 recreation leader 양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RRC 초기에는 어떤 개인이 종합적으로 이러한 분야를 섭렵하는 것에 중점적으로 힘을 기울였으나, 70년대 중반부터 RRC 회원은 어느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고, 이것을 통합하여 커다란 힘을 발휘하도록 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에 따라 RRC 회원들은 song부, game부, folk dance부, 그리고 decoration부로 나뉘어 각자 맡은 분야의 발전에 힘썼는데, 이들 부에서는 부장의 리드에 따라 부별 모임을 갖고 나름대로의 연구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이러한 연구의 과정에서 가장 유용하게 활용된 것이 YMCA, YWCA의 행사들이었다. 당시 YMCA에서는 매주 목요일마다 작곡가 겸 sing along 지도자 이요섭이 진행하는 Sing Along-Y라는 프로그램이 열렸고, 화요일에는 F.D 지도자가 진행하는 Folk Dance 강습이 있었다. 또한 YWCA에서도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마다 Folk Dance 강습이 있었다. 이들 YMCA 및 YWCA의 행사에 참여하는 회원들은 그 자료를 서클로 가져오곤 했는데, Folk Dance 같은 경우는 그날 배운 내용을 메모하거나 외워서 가져와야 했다. 또한 Folk Dance 사이의 쉬는 시간에 열리는 Waltz 및 Polka 시간도 흥미로운 것이어서, RRC 회원들은 서클 룸에서 이러한 Social Dance를 열심히 연습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사에 열심히 참여한 회원들은 13기의 한혜경, 박인자, 이성임, 김은덕 등 여자 회원들과 14기의 정원찬, 이경애, 김은향 등이었다. F.D부장이었던 13기의 한창수 회원은 1학년이던 1976년부터 YMCA와 YWCA를 열심히 다니며 자료를 모아 230 곡의 F.D 곡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자료가 서클의 자료로 전해지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 할 수 있다.

 

 ▶ YWCA 어린이 캠프 참가 ◀

 

  YWCA에서는 해마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공개 모집하여 해수욕장으로 3박 4일의 캠프를 떠나는 행사를 매년 가졌다. 1976년부터 RRC와의 협조가 시작되었는데, 충남 대천 해수욕장으로 떠난 1977년에도 캠프의 남자 선생님들을 RRC에서 선발하였다. 여기 참가한 RRC 회원들은 13기 한창수, 백치옥, 조용호 회원들과 14기 박종언, 최병갑, 김종민, 유형종, 정원찬 회원이었다. 또한, 여자 선생님들은 YWCA 회원들로 구성되었다.

 

  캠프는 총괄 지도에 레크리에이션 협회의 이상호 회장, 그리고, YWCA 임원단 및 담임선생님으로 구성되었다. 참가 어린이들을 꽃마을, 새마을, 별마을, 산마을 등의 4개 반으로 나누고 각 마을에 남자 2 명, 여자 2 명씩의 선생님들을 배치하였다. 꽃마을에는 한창수, 김종민 회원, 새마을에는 박종언, 유형종 회원, 별마을에는 최병갑, 정원찬 회원, 그리고 산마을에는 조용호, 백치옥 회원이 각각 배치되어 3박 4일 동안의 캠프를 재미있고, 알차게 이끌었다.

 

  캠프 기간 중의 해프닝 한 가지. 마지막 날 밤에 14기의 정원찬, 박종언 회원은 어린이들을 모두 재우고, 밖에 나와 밤바다를 보며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하얀 옷을 입은 젊은 여자가 옆에 와 앉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하여 어디서 왔는지, 무얼하러 왔는지 물어도 이 여자는 미소만 띌 뿐 통 대답을 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두려움에 머리칼이 일어선 정원찬, 박종언 두 회원은 이제 그만 자자고 막사 안으로 들어왔는데, 이 여자도 따라 들어오려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두 회원은 이 곳은 어린이 캠프 막사라서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고 하고 문을 닫으려는데, 그 여자도 막무가내로 문을 잡아 당기는 것이었다. 가냘픈 여자의 힘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힘을 20세 남자 두 사람이 겨우 물리치고 문을 걸어 잠그는 데 성공. 두 회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밤새 막사 주위를 돌며 노래를 불러댔고, 두 회원은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 이동학 회원과 술집들 ◀

 

  1977년의 술자리는 대부분의 경우 이동학(11기) 회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동학 회원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참가를 최충일 선수에게 아깝게 넘겨 준 권투 선수였으며, 당시 ROTC에 속한 4학년이었는데, 서클 활동에 매우 적극적이어서 항상 서클룸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또한 술자리에서 후배들에게 술을 권하며 서클 얘기를 많이 해 주어, 당시의 후배들은 여러 좋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가끔씩 버릇없는 후배가 있으면 권투로 단련된 주먹을 코 앞으로 내밀며 ‘박어 !’라고 하여, 후배가 전속력으로 머리를 부딪힐 때까지 계속 하였다. 또한 이동학 회원은 술이 많이 취한 것 처럼 보이는 후배는 꼭 자신의 집(북가좌동)으로 데려가 재워 주든지, 아니면 자신의 전화번호를 외우게 하고 보내어, 만일 차가 끊어지면 꼭 자신에게 전화를 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이동학 회원의 후배치고 그 주먹에 머리를 부딪히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으며, 또한 술꾼치고 이동학 회원의 집에 가 보지 않은 사람도 드물었다.

 

 ▶ RRC 단골집들 ◀

 

  70년대 RRC 최고의 단골 술집은 Fedra 였다. 이동학 회원이 개척한 Fedra는 RRC의 안방처럼 많은 RRC 인들이 찾는 곳이었다. 주종은 소주, 약주, 막걸리 등이었으며, 안주로는 김치찌개, 동태찌개, 계란말이 (벽에는 계란마끼라고 써 붙였음), 두부 등이었다.

 

  이곳에 외상을 하지 않은 RRC 인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돈이 없이도 마실 수 있는 곳이었으며, 때로는 외상 값을 갚지 못하여 찾아가지 못하고, 때로는 멀리 돌아다니는 사람도 간혹 있었으나, 항상 늦게 갚더라도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몇 마디 하고는 그걸로 끝이었다. 현재의 12,13,14기 회원들 중에는 그 때 갚지 않은 외상값이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2000년 2월 현재 Fedra는 아직도 같은 장소에 존재하고 있으며, 이제는 환갑이 넘어버린 Fedra 아줌마도 옛 단골손님들의 이름을 아직 기억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외에도 당시에는 막걸리를 몰래 담가서 파는 집도 있었고, 굴다리 아래 드럼통에 꽁치구워 파는 술집도 있었다. 모두 싼 가격에 부담없이 마실 수 있는 곳이어서 학생들로부터 인기가 높았다. 12월에는 풍년을 맞이하여 쌀 막걸리가 시판되었고, 이동학 회원의 ‘살막걸리 마시러 가자’라는 구호아래 많은 사람들이 12월 1일에 쌀막걸리를 마시며 흥청대기도 하였다.

 

  당시 RRC의 술자리에서는 야자타임이 많이 개최되었으며, 후배들이 선배들에게 기합을 주며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 놓는 시간이었다. 야자타임 끝난 후 이에 대한 평가회도 벌어졌으며, 올바른 야자타임에 대한 토론도 있었다.

 

  RRC의 단골집으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한 군데 더 있다. 바로 최종철(11)회원의 하숙집. 집이 부산이었던 최종철 회원은 대학생활 대부분을 학교 앞에서 하숙을 하며 지냈다. 이 하숙집은 많은 RRC 회원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했는데, 특히 집이 인천이어서 차가 끊어진다든지, 술을 많이 마셔 통행금지에 걸리면 이 하숙집 신세를 지곤 했다. 가로 2미터 세로 4미터 정도의 하숙방에 14명이 잤던 기록도 있다고 한다.

 

 ▶ RRC 체육 ◀

 

  1977년 RRC의 체육활동은 11기 이동학(체교) 회원이 주도하였다. 이동학 회원은 틈만 나면 서클룸에 있던 회원들을 이끌고 운동장 (현 도서관 자리)으로 나가 축구를 하거나 농구장에서 농구를 하였다. 당시 축구를 잘 하던 회원으로는 11기 이동학, 12기 이종창, 선우광범, 13기 김현철,14기 최세환, 최병갑 등이 있었으며, 골키퍼로는 10기 양승주 회원이 맹활약하였다.

  또한 농구를 잘 하던 회원들은 김경(11), 이동학(11), 선우광범(12), 한창수(13), 최세환(14), 최병갑(14)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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