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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3 23:43

1978년의 R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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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8년 1학기 임원단과 회원들
 
  유신정권의 말기에 해당되는 1978년 3월, RRC를 이끌어가는 임원단은 13기 멤버들이었다. 당시 3학년이었던 회장 최용석(신학과), 부회장 한혜경(의생활), 총무 조용호(신학과)가 주축을 이루어, 기획부장 송영관(기계), 연구부장 백치옥(화공), 관리부장 김정삼(기계)이 1977년 가을부터 RRC를 이끌고 있었고, 조수현(신학), 김현철(기계) 등의 13기 회원들이 이들을 도와 주고 있었다.

 
  그러나 1978년 3월부터 총무를 맡았던 조용호 회원이 ROTC에 들어가면서 연일 계속되는 고된 훈련과 총무직을 겸할 수 없어 총무자리가 공석이 되었고, 워낙 인원이 적었던 13기로서는 마땅한 총무를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것이 14기에서 총무를 뽑자는 것. 당시 날카로운 두뇌와 빈틈없는 성격, 그러면서도 원만한 대인관계를 갖고 있었던 박찬규(전기) 회원이 총무에 올라 1978년 1학기의 임원단으로 활약하였다.

 

  이렇게 구성된 임원단에서 최용석 회장과 김정삼 회원을 제외한 나머지 13기 회원들은 서클룸에 잘 나타나지 않았었는데, 조용호 회원은 ROTC 때문에, 그리고 나머지 회원들은 여러가지 사정으로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따라서, 최용석 회장은 1년 후배들인 14기 회원들을 중심으로 일을 꾸려나갔고, 기타 13기 회원으로서는 유일하게 김정삼 회원이 장발과 색안경에 깃 높은 남방셔츠를 입고 서클룸 한 구석에서 바람을 잡으며 서클룸 분위기 활성화에 노력하였다.

 

  1978년 재학생 중 왕고참은 최종철 회원(11기, 금속)으로서 적극적으로 나서기 보다는 뒤에서 많은 조언과 찬조금 등으로 회원들의 융화에 힘썼고, 선배로서는 12기에서 신종섭(천문기상), 선우광범(금속), 이은미(식생) 회원들이 서클룸에 많이 나타나 후배들을 챙겼다. 그 해에는 군에서 제대한 선배들이 그다지 없어, 상대적으로 어린(?) 연령의 11, 12기 회원들이 많은 활약을 하였다.

 

  13기 임원단 밑에서 많은 일을 하였던 14기 회원들은 총무 박찬규(전기)를 중심으로 song부장 최세환(요업), game부장 박종언(전기), folk dance 부장 정원찬(화공), decoration 부장 조성표(경영) 등 연구부 산하 부장들 외에 이종재(전기), 이종걸(전기), 송재훈(전기), 최영상(경제), 최항식(요업), 이홍구(건축), 박준환(전기), 이경애(아동), 김은향(아동), 한은경(중문) 등이 있었고, 특히 이종재 회원은 8기 최정훈-> 11기 이동학 회원들로 이루어지는 서클 공식 바람잡이의 계보를 이어받고 바람잡이로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14기의 대부분은 1978년 1학기 동안 독선적인 운영을 하고자 하는 최용석 회장과 잦은 마찰을 빚으며 불협화음을 내기도 하였고, 이 여파로 박준환, 이경애, 김은향 회원들은 13기가 임원진을 맡았던 78년 1학기 동안 서클룸에 나타나지 않는 일도 있었다.

 

 

2. 무악골 잔치 (3/17)

 
  최용석 회장은 취임이래 공약사업으로 하기캠프의 텐트보수, 본부텐트 구입 및 식판 마련 등을 내세웠다. 사실 1977년 캠프때 까지 학교의 텐트를 빌려 본부텐트로 삼았고, 캠프원들에게 지급된 텐트도 부실하였으며, 식판이 없어 각자 그릇을 가져다가 식사를 하였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빌린 본부텐트는 지붕만 있고 옆면이 없어 비가 올 경우 본부물품들이 고스란히 젖는데다, 천이 얇아 바람에 약한 것이었다.

 

  이른바 ‘잘살아보세’와 비슷하게 캠프 시설의 선진화를 꾀한 최용석 회장의 이러한 목표는 많은 돈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한 최용석 회장의 계획은 5월의 Game Party에서 많은 돈을 벌자는 것이었으며, 그러자면 많은 상품을 섭외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1학년 회원들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무악골잔치는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계획된 행사였다. 즉 전 연세대학교 신입생들을 위한 party를 하는 것으로서 사실 학교 측에서 위임받은 공식 신입생환영회는 아니었지만, 신입생들의 들뜬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간다는 취지에서 계획되었으며, 학교측으로서나 신입생들의 입장에서나 RRC의 입장에서나 나쁠 것은 없었다.

 

  백양로를 비롯한 전 캠퍼스 곳곳에 RRC 특유의 화려한 포스터와 현수막을 붙이고 오뚜기가 교정을 돌아다니며 바람을 잡았으며, 프로그램은 일반적인 RRC 프로그램으로서, 14기 최세환, 정원찬이 Double MC를 맡고 그 뒤를 이어 Group Sound가 Dance Time을 맡았다. Group Sound로는 1978년 2월 정원찬 회원이 막 참여하여 시작하였던 Fevers라는 그룹이 선정되었으며, 이것이 Fevers의 첫 무대가 되었고 ‘그대로 그렇게’ 라는 노래가 처음 발표되는 자리가 되었다.

 

  프로그램은 일단 성공적이었고, 많은 신입생들이 학생식당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약간 무리한 진행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신입생들에게 RRC를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실제 전보다 많은 신입생들이 RRC의 문을 두드렸다.

 

  15기의 백성일 회원은 당시 회원이 아니었으나, 무악골잔치가 열리던 날 이미 RRC에 입회한 같은 과 친구를 찾으러 서클룸에 왔다가 최용석 회장에게 "이 친구 여기서 뭐하고 있어. 어서 가야지." 하는 소리를 듣고 얼떨결에 "예" 하고는, 학생식당으로 끌려가 무악골잔치에 참여하고 서클에 들어왔던 일도 있었고, 그 후 백성일 회원은 자신이 찾으러 왔던 친구보다 더 열성적으로 서클활동을 하였다.

 

 

3. 신입생환영회 (3/25) 
 
  15기에는 재주 있는 회원들이 많이 있었다. 임동일(기계), 백성일(전자), 고영준(응통), 이준영(응통), 김형수(경영), 남대식(경영), 김태환(토목), 이택규(경영), 신태균(법학), 윤석윤(기계), 윤화영(기계), 임효순(정외), 박용란(체교), 홍선주(경영), 이경희(간호), 정연태(간호), 박원숙(간호), 이숙(가정) 등등등……

 

  일반적으로 신입회원들은 신입생환영회를 거치며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게 되는데 반해 15기 회원들은 약간 특수한 경험을 하였다.

 

  1학년 회원들을 많이 포섭해야 한다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당시 최용석 회장은 입회원서를 쓴 모든 1학년들을 대상으로, 14기 회원들 중 12명을 조장으로 한 춘계수양회의 12개조를 편성하였고, 조장들로 하여금 1학년들을 접선하게 하여 각 조에 할당된 인원들이 춘계수양회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고 나아가 게임파티 때까지 서클에 열심히 나올 수 있도록 하였다. 어떻게 보면 5호담당제 같기도 하고, 군대의 사수-조수 (단 조수가 많은) 관계 같기도 하고, 대학원의 지도교수-학생 관계 같기도 한 관계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12개의 조이름은 단순히 A에서 L 까지로 정하였다가, 나중에12지에 나오는 동물들의 이름을 따라 하였다. (쥐, 소, 호랑이, ………, 돼지) 그러나, 각 조별로 동물들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냥 알파벳을 고수하는 조도 있었고, 동물이름을 약간 변형하는 조도 있었다. (예 : 양조 ▶ 양아치조)

 

  어찌보면 지나친 발상일 수도 있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좋은 아이디어일 수도 있었다. 즉 신입회원들은 처음 시작하는 서클 관련 문제는 물론 모든 대학생활에 대해 각 조장들과 상의할 수도 있었고, 훨씬 좋은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또한, 재미있었던 것은 나이문제를 고려하여 조편성 시 재수한 15기들은 재수한 14기 회원들의 조에 편성되도록 배려하였고, (예 : 15기 김형수-> 14기 최영상) 이미 어떤 분야에 재주가 보이는 15기들은 그 분야를 맡은 14기 회원들의 조에 배치되도록 하여 주특기를 계속 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예 : F.D분야의 15기 박용란 ▶ 14기 정원찬, Decoration분야의 15기 고영준 ▶ 14기 조성표)

 

  신입생환영회 당일날에도 이러한 분위기는 계속 이어져, 앉는 자리도 각 조별로 앉고, 게임도 각 조별 대항 게임등이 많이 있었다. 어쨌든 최용석 회장의 용의주도하면서도 약간 무리가 있어 보였던 이 기획은 게임파티 때까지 많은 수의 15기 회원들이 남아 있도록 함으로써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4. 춘계수양회 (4/1 ~ 4/2)

 
  1978년의 춘계수양회는 경기도 마석 수동 캠프장이었다. 이미 12개의 조가 편성되어 있었으나, 인원이 많이 남지 않았던 조들이 서로 통합되어 8개 조로 축소되었다. 저녁시간에는 촌극대회와 게임 및 FD 프로그램이 있었고, 이어 벌어진 술판에서는 수양회 때마다 참가하여 분위기를 압도하는 8기 최정훈(신학) 회원의 입담이 신입회원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였다.

 

  이튿날, 항상 MT 둘째날이면 그렇듯이 숙취로 인하여 머리가 깨지는 듯한 아픔을 참고 열린 체육대회 발야구경기에서는 단연 15기 박용란 회원이 스타가 되었다. 남녀 혼성경기에서 남자는 한쪽 발을 붙인 채 차도록 하고, 여자는 달려와서 차도록 하였는데, 계속 홈런을 날리는 박용란 회원의 비거리가 가장 길어 남자냐 여자냐 하는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비가 내려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모두들 "어찌갈꺼나 바람부는데 ~~" 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5. 게임파티 (5/13)
 
  게임파티는 최용석 회장에게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즉 RRC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가장 종합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행사가 하기캠프라면, 게임파티는 하기캠프를 좀더 편안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자원(돈)을 모을 수 있는 것이었다.

 

  축제 마지막날 열리는 게임파티를 위하여 전 RRC 회원은 게임도구 제작팀 (팀장 박종언), Decoration 팀 (팀장 조성표), CM송 제작팀 (팀장 정원찬) 등으로 나뉘어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였다. 게임도구 제작팀은 대강당 1층의 창고에서 망치와 톱 등으로 무장하고 연일 자르고 붙이고 하며 게임도구를 만들어 냈고, Decoration에 재주 있는 사람들은 온갖 재미있는 모양으로 포스터, 현수막 그리고 행사장 장식품들을 만들었다. CM송 제작은 2번에 걸쳐 서클룸에서 회원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CM송, 당시 유행하던 노래, 시, 대사 등의 가사를 바꾸어 게임파티 선전 CM송을 녹음하여 Ticket 예매 창구와 행사 당일 행사장에 계속 그 음악을 틀었다. CM송 제작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한 회원은 12기 이종창 회원으로서, 뽕짝 가사를 바꾼 CM송들을 도맡아서 구성지게 불러 제꼈다.

 

  그러나, 게임파티 준비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는 역시 물품 섭외였다. 14기 이종재 회원을 책임자로 하여, 모든 1,2 학년 회원들의 시간표를 check하여 공강 시간에 각 회사를 돌며 홍보물품을 조달하도록 하였고, 초반에는 1학년과 2학년을 한 팀으로 두 명씩 파견하였으나, 후반에는 1 명씩 회사들을 찾아다니도록 하였다. 몇 해를 거쳐 내려온 각 회사 홍보 담당자들의 list가 중요한 자료가 되었고, 각 회사를 찾아가 이야기하는 방법에 대한 선배들의 교육이 좋은 무기가 되었다.

 

  마지막 한 회사까지 열심히 쫓아다닌 끝에 모두 200만원 상당의 상품이 모였다. 당시 가장 비싼 담배 한 갑이 300원 (거북선과 SUN)이었으므로 1999년 물가로 환산하면 약 1000만원 정도의 상품이라고 추정된다. Decoration 부장 조성표 회원은 백양로에 "200만원의 상품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라고 특유의 화려하고 예쁜 글씨체로 커다란 포스터를 붙였다.

 

  축제 마지막 날 많은 남녀들이 게임파티를 찾아, 행사장은 대 성황을 이루었다. 학생회관 1층 테라스에 위치한 행사장에는 탁상축구, 탁상골프, 풍선터뜨리기, 룰렛트 등의 게임들이 가득했고, 입구에는 브리테니카 백과사전, 기타 등 고가품에서부터 온갖 종류의 물건, 상품권, 장식품 등의 물건들이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여 오가는 사람들의 한탕 심리를 자극하였다. 파인힐에서 제공받은 티켓 한 장으로는 세개의 게임을 할 수 있었는데, 브리테니카 백과사전과 같은 고가품은 여러 장의 티켓을 사서 높은 점수를 얻어야 탈 수 있었고,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사람들에게도 상품을 주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RRC 회원들은 행사장에서 각자 데리고 온 파트너와 함께 분주히 일을 하였고, 결과적으로 많은 수익을 올려 하기캠프 준비를 원활히 할 수 있었다.

 

 

6. 하기캠프 준비

 
  하기캠프의 준비는 축제와 게임파티가 끝나고 2주일만에 바로 시작되었다. 그 첫 스텝은 새로운 캠프지를 찾는 것. 이를 위하여 최세환, 이종재, 박찬규, 한은경 등 4명의 건강한 14기 회원들이 선발되었으며, 이들은 충남 장항에서 태안반도 끝까지 버스와 도보로 6월3일(토)부터 6월6일(화)까지 3박4일간의 답사를 하였다.(6월5일은 수업을 빼먹었음) 농번기에 배낭메고 논둑길을 걸어가다가 간첩으로 오인받는 일도 있었으나, 이들은 끝까지 답사를 무사히 마치고 충남 태안군 원북면 방갈리 구래포 해수욕장을 처음 발견한 공을 세우며 돌아왔다.

 

  RRC는 항상 인적이 드문 하기캠프를 찾기 때문에 국내의 다수 해수욕장을 개발한 공로가 있다. 초창기에 몽산포해수욕장 (70년대 초반)을 비롯하여 학암포 (70년대 중반), 구래포(70년대 후반), 꽃지해수욕장 (80년대 초반) 등등등…  이중 박찬규 회원은 구래포(78년)와 꽃지(83년)의 두 군데 해수욕장을 발견하여 RRC 답사의 대명사로 꼽힌다.

 

  한편, 임원진은 게임파티의 수익금으로 바라던 본부텐트를 구입하고, 식판을 마련하였으며, 모자라는 텐트를 구입하여 캠프 생활의 최적화를 꾀하였다. 본부텐트를 구입하던 날은, 회원들이 모두 모여 짙은 녹색의 텐트를 대강당 앞에 펼쳐 놓고 칼라 스프레이로 텐트 위에 여러가지 모양을 그려 넣는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프로그램 분야는 당시 6기 김승남 회원(종교음악)의 열성적인 도움에 힘입어 14, 15기 회원들을 중심으로 준비되었다. 77년 캠프까지는 2학년 회원들의 수가 그다지 많지 않아서 1학년들에게 조장을 맡겼고, 밤 프로그램도 임원단 이상의 선배들이 맡아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78년에는 많은 수의 2학년 회원들이 있었고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회원도 많았기 때문에 조장과 프로그램 진행을 모두 14기 회원들이 맡아 하였다. 단 77년까지 8개조로 운영되던 것을 78년부터는 6개조로 조의 수는 줄이되 조원들은 늘어나도록 편성하였다.

 

  한편, 구래포 해수욕장은 해변가 옆에 커다랗고 독립된 숲이 있는 곳으로서 이곳은 RRC의 캠프지로서는 최적의 장소였다. 단, 숲속에 길을 만들고, 프로그램 장소, 본부텐트 장소, 각 조별 텐트장소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선발대는 심한 고생을 하여야 했다. 선발대장으로 선정된  14기 박종언과 15기의 대원들(임동일, 윤석윤, 백성일, 윤화영, 박원숙)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이 숲속을 마구 헤집으며 6개의 조를 위한 6개의 개미집같은 텐트장소를 만들고 숲 중앙에 커다란 프로그램 장소와 본부텐트를 마련하였다.

 

  선발대는 또한 현지 주민들인 구래포 청년들과의 친목도모를 위한 자리를 많이 마련하여 캠프 프로그램 진행이 방해를 받지 않도록 사전 대비를 하였고, 이들 중 한 사람은 RRC가 철수한 후에도 서울에 찾아와 연락을 하는 등 끈끈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7. 하기캠프 (7.24 ~ 7.29)

 
  78년 하기캠프 본부는 캠프장 최용석(13기), 총무 박찬규(14기), 프로그램부장 김승남(6기), 생활부장 한혜경(13기), 야영장 최종철(11기), 물품관리 김정삼(13기)등으로 이루어졌다. 각 조는 ‘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고 14기의 촌장들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산촌(이만종), 신촌(조성표), 어촌(최세환), 마촌(이종재), 무촌(정원찬), 떡촌(송재훈)등이 그 이름이었고, 각 촌에는 대략 12~14명의 인원들이 있었다. 전체 캠프의 남녀비율도 적당하여, 본부인원과 촌장들 정도를 빼면 거의 1:1이 될 정도로 이루어졌다.

 

  캠프의 밤 프로그램은 월요일 '코이노니아의 밤'(진행 정원찬), 화요일에는 '민속제'(진행 조성표), 수요일에는 '촌극대회'(진행 최세환), 목요일 '원시종합예술제'(진행 정원찬), 금요일 '너와나 그리고 구래포'(진행 최세환) 등이었다. 화요일의 민속제는 캠프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인 것으로, 김승남 회원과 조성표 회원의 야심작이었다. 전래 놀이들을 모아 팀별 대항전을 벌이는 것으로서, 각 조별로 준비한 고무줄 경연대회가 가장 인기를 끌었다.

 

  낮 프로그램은 'Little Olympic'(진행 박종언)이 오전에 진행되었고, 오후에는 느슨하게 조별 모임이나 낮잠 시간이 이루어졌다. 종합 1위는 이만종 촌장을 중심으로 15기 회원인 신태균, 이준영, 백성일, 이경희 등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던 산촌이 차지하였다.

 

 

8. 1978년 2학기 임원단과 회원들

 
  하기캠프를 마치고 9월에 들어서면서 13기 최용석 회장을 비롯한 임원단의 임기가 만료되고, 14기 회원들이 임원단을 맡게 된다. 임원단을 결정하는 것은 해당 기의 회원들끼리 회의를 거쳐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인 예이며, 14기도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 임원단을 확정하였다. 2학년 2학기를 맞이하는 회원들이 그 때까지 소홀해 왔던 공부에 좀더 신경을 쓰고 자기의 미래에 해야 할 일들을 시작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그러다 보니 회장을 맡으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전까지의 예로 보아 회장과 총무는 거의 자신의 생활을 포기해야 할 만큼 일도 많고 바쁜 것이 사실이었다.

 

  14기는 이 문제를 인해전술과 짜임새 있는 조직력으로 해결하기로 하였다. 일단 열성적인 회원이 많고, 각 회원들마다 여러 분야에 나름대로의 장점이 많은 것을 이용하여 적절하게 인원을 배치하여 개인 희생을 최소화하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우선 회장은 대외적으로 서클을 대표하는 일을 맡고 그 외의 일은 세부적으로 간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또한 총무는 온갖 잡다한 일을 맡아 하기는 하되, 프로그램 및 순수 레크리에이션 연구 부분에 대해서는 손을 대지 않기로 하였다. 또한 당시까지 거의 유명무실하던 기획부장, 관리부장, 연구부장의 역할을 늘려 행사 기획에 기획부장이 꼭 참여 하도록 하고, 관리부장을 모든 행사에 대한 고정 물품 관리부장으로 하였다. 또한 연구부장은 1학년 학생들로 구성된 song, game, folk dance, decoration, 이론 부장들과 함께 recreation 순수 연구에 힘쓰는 한편, 캠프나 수양회(MT) 때 프로그램에 대한 전반적인 진행을 맡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임원진들을 14기 중에서도 서클에 약간 덜(?) 열성적이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에게 맡겨 어차피 열성적으로 나올 사람들은 음지에서 도와 주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결성된 14기 임원단은 회장 조성표(경영), 부회장 한은경(중문), 총무 박찬규(전기), 기획 이종걸(전기), 관리 최항식(전자), 연구 정원찬(화공) 등이었다. 14기 회원 중 박종언, 이종재, 최영상, 최세환 등 열성적인 회원들을 모두 임원단에서 빼고 side에서 도와 주도록 한 것이다. 실제로 박종언 회원은 온갖 노가다 일과 총무 보조 역할, 이종재 회원은 서클 바람잡이, 최영상 회원은 역시 노가다 일과 무게있는 조언, 최세환 회원은 프로그램 분야에서 임원단 못지 않은 많은 공헌을 하였다.

 

  또한 연구부 산하의 15기 부장들로는 song부장 이택규(경영), game부장 남대식(경영, 후에 백성일, 김형수, 임동일로 이어짐), FD부장 박용란(체교), Deco부장 임효순(정외, 후에 김태환으로 교체), 그리고 새로이 탄생된 이론부장에는 신태균(법학)이 선발되었다. 이들 15기 부장들의 활동도 아주 활발하였고, 각 분야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9. R-Day Party (9/2)
 
  서클 탄생 12주년을 기념하는 R-day Party가 9월 2일 개최되어 많은 선후배들이 모여 서클의 생일을 축하하는 기회를 가졌다. 새로 결성된 임원단도 선을 보였고, 새로운 15기 부장들도 프로그램 진행을 맡아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는 기회를 가졌다.

 

 

10. 추계수양회 (10/7 ~ 10/9)
 

  추계수양회는 14기 임원진이 처음으로 기획하여 실시한 행사로서 많은 새로운 기획을 시도하였다. 우선 10월 9일(월)이 휴일 (한글날)이었던 점을 이용하여 MT를 2박 3일로 늘리고, 장소도 남한산성으로 하여 산성 내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프로그램을 하였다.

  금치조 (조장 이택규, 당시에는 배추값이 폭등하여 김치가 금치로 불리웠음), YUKA (조장 김형수, Yonsei University 킹카 Association), 조family(조장 남대식), 깨비조(조장 임동일), 또라이조(조장 신태균)의 다섯 개 조로 나뉘어진 RRC 회원들은 각 조별로 도착하여 남한산성 내에서 지도를 보고 숙소를 찾아오는 일종의 Orienteering으로 수양회를 시작하였다.

 

  이 중, 5명으로 구성된 조 family는 조원들 별명을 조포(조물주의 포기작, 최세환), 조실(조물주의 실패작, 이준영), 조야(조물주의 야심작, 선우광범 : 턱을 강조했음), 조미(조물주의 미완성작, 이성임 : 키가 작았음), 조걸(조물주의 걸작, 남대식) 등으로 꾸며 인기를 얻었고, 도깨비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신종섭 회원을 포함한 깨비조는 조원들 별명을 도깨비(신종섭), 허깨비(이종걸), 장작깨비(임동일 : 길쭉함), 성냥깨비(백성일 : 말랐음), 홍두깨비(박용란 : 술마시면 얼굴이 빨개짐) 등등으로 하는 재치를 선보였다.

 

  첫날 저녁에는 당시 MBC, TBC 등 방송국에서 많이 개최하던 가요제의 형식을 빌어 RRC 가요제를 열었고, 둘째날 저녁에는 MT에서 많이 애용되는 촌극대회가 개최되었다. 낮 프로그램은 이리저리 이동하며 진행되었는데, 둘째날 아침 체조는 동문 밖 공터에서, 점심시간은 수어장대에서, 저녁식사는 꼭대기의 성벽 옆에서, 저녁 프로그램은 남한산성 한 가운데 있는 사각정에서, 그리고 셋째날 체육대회는 남한산성 내의 초등학교에서 열리는 등, 남한산성 내를 모두 관광할 수 있는 방식으로 프로그램이 구성되었다.

 

  서클을 졸업한 최정훈(8기), 김경(11기), 박혜란(11기) 선배들이 찾아와 분위기를 맞추어 주었으며, 둘째날 저녁 2학년 이상 남자회원들이 밖에 모여 선후배간의 대단히 진지한 대화(?)를 나눌 때, 11기 박혜란 회원은 여자의 몸으로 15기 유명한 술꾼들인 남대식, 백성일, 김형수, 이준영 등과 4대1로 한잔씩 주고 받고 주고 받고 하여 밖에서 있었던 진지한 대화가 끝났을 때 쯤에는 15기 술꾼들을 모두 무너뜨리고, 가지런히 잘 눕혀주고, 이불 덮어준 뒤 혼자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앉아 있어 RRC 제일의 술꾼임을 다시한번 입증하였다.

 

  14기 임원진으로 이루어진 본부는 회장 조성표, 부회장 한은경, 총무 박찬규, 진행 정원찬으로 이루어졌는데, 일반적으로 회장 총무가 모든 일을 다 하던 것에 비해, 4명의 역할이 아주 분명하여 효과적으로 행사를 진행할 수 있었고, 또한 본부에 속하지 않은 이종걸, 최영상, 최세환 회원들은 다음 장소의 프로그램 준비 (전선깔기, 음악 준비 등)를 철저히 해 주어 효과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또한 끼 많은 15기 회원들이 조장 및 프로그램 사회를 맡아 분위기를 살렸고, 재학생 선배들인 신종섭, 선우광범, 김정삼 회원들의 협조가 두드러져, 전체적으로 돋보인 행사가 되었다.

 

 

11. 마지막 정기집회 (11월 어느 날)

  
  정기집회에서는 song, game, folk dance가 진행되었으며 매주 사회자가 바뀌어 회원, 특히 1학년 모두에게 사회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물론 끝에는 사회를 맡은 사람들의 진행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조언, 격려 등이 이어지곤 했다.

 

  1978년 2학기 마지막 정기집회는 졸업생 환송회가 열리기 조금 전에 있었고, 이에 따라 임원진에서는 마지막 정기집회의 사회 보는 역할을 졸업을 앞둔 4학년 12기 회원들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12기 회원 중 마지막까지 서클 행사에 열심히 참가했던 신종섭 (song), 선우광범 (game), 이은미 (folk dance) 회원들에게 진행을 맡긴 것이다.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마지막으로 서클에서 뭔가 할 수 있는 기회를, 그리고 후배들에게는 선배들이 하는 프로그램 진행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사실 3,4학년이 될 경우 외부에 나가는 프로그램이나 서클 내부에서 프로그램을 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그들이 사회보는 것을 1학년들이 볼 기회는 거의 없었던 실정이었다.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졸업을 앞둔 바쁜 와중에도 3명의 12기 회원들은 자료를 뒤지고 또 뒤져 알차고 알찬 내용으로 프로그램을 꾸며 주었고, 그 성실한 준비 자세에 1,2학년 회원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또한 프로그램 진행도 원숙하고 부드러워, 당시 프로그램 진행법을 배우던 1학년 회원들은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것은 4학년 고참들이 후배들을 위해서 열심히 준비와 진행을 하면서 보여준 열정 속에 진하게 녹아 있던 서클에 대한 깊은 사랑을 모두가 느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날의 정기집회는 모든 사람이 그 사랑 속에서 하나가 된 것과 같은 포근하고 행복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12. 크리스마스 파티 (12월 후반 어느 날) 
 
  1978년이 저물어가던 어느날 RRC의 크리스마스 파티가 있었다. 신청자를 접수 받아보니 남자 8명, 여자 6명이 신청을 하였고 모두 1,2 학년이었다. 이 파티의 주최자는 14기 이종재와 15기 임동일로 하였고 장소는 15기 임동일 회원의 집으로 하였다. 신림동에 있었던 임동일 회원의 집에는 그 날 부모님께서 지방에 가시고 집이 텅 비어 있어, 파티에는 가장 좋은 분위기였다.

 

  파티 당일 날 참가자들 모두 작은 선물을 하나씩 든 채, 남자들은 꽃다방에, 여자들은 복지다방에 30분 간격을 두고 모였고, 참가자들은 주최자가 나누어 주는 쪽지를 들고 각자 떠났다. 쪽지에는 ‘코스모스 백화점 2층 여자 화장실 앞’, ‘사직 터널 안’, ‘황인석 선배가 경영하던 레코드 가게’ 등등 서울 시내의 모 처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른바 007 미팅인데, 만나는 당사자와 사전에 협의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곳에 가서 무작정 기다릴 수 밖에 없었고, 참가자들은 모두 무사히 자기 파트너를 만날 수 있었다.파트너와 선물을 교환하고, 모두 임동일 회원의 집에 모여 저녁 먹고,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게임 하고, 춤도 추고 하며 즐거운 밤을 보냈다.

 

 

13. 동계봉사 (1979/1/11 ~ 1/20) 
 

  1979년 1월의 동계봉사는 평소의 1주일보다 긴 기간인 약 열흘에 걸쳐 인천의 인천보육원에서 실시되었다.

 

  항상 그렇듯이 동계봉사에서는 각 반 담임선생님을 맡은 1학년 회원들이 가장 열성적으로 활동하였다. 임동일, 남대식, 홍선주, 박원숙, 이경희, 박용란, 정연태 등 1학년 회원들은 하루 3-4 시간의 수면에도 불구하고 열성적으로 어린이들을 위해 헌신적인 봉사를 아끼지 않았다.

 

  교육, 레크리에이션, 체육 등의 낮 프로그램과 합창대회, 촌극대회 등 저녁 프로그램 등에서 인천 보육원의 많은 원아들은 RRC 회원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졌고, 청소, 눈쓸기 등에서 한데 어울려 함께 일하는 기회를 가졌다. 합창대회 후에는 선생님들 (RRC회원들)이 모두 찬조출연으로 합창을 하여 원아들의 박수를 받았다.

 

  일반적으로 동계봉사에서는 회원들이 너무 열성적으로 일하고, 휴식없이 수면부족으로 시달리기 때문에, 1979년 1월의 동계봉사에서는 예외적으로 중간 하루의 휴식일을 두었다. 열흘간의 긴 봉사활동 중 하루를 아무런 프로그램 없이 지낸 것인데, 원아들과 회원들 모두에게 값진 재충전 기간이 되었고, 후반부 봉사를 알차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14. 1978년에 있었던 각종 사건들 
 

▶ 14기 이종재 회원의 수박탈취 사건◀

 

  1978년에는 군에서 제대한 선배가 없었고, 4학년 회원들(신종섭, 선우광범, 이은미, 강혜영)이 졸업 준비로 바빴고, 3학년인 13기 회원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서클룸에 잘 나타나지 않아, 주로 14기와 15기가 서클의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저녁 때 신촌에서 술도 많이 마셨는데, 바람잡이였던 14기 이종재 회원도 15기 회원들과 술을 잘 마시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1978년 여름 어느날, 이종재 회원은 다수의 15기 회원들과 많은 술을 마셨고, 모두들 주머니 속의 돈이 바닥난 상태로 12시 가까이 되어 집으로 가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 (당시에는 12시부터 4시까지 통행금지가 있었음) 그 때 15기의 모 회원이 목이 마르다며 수박을 먹고 싶다고 했고, 이 말을 들은 이종재 회원 ‘후배들이 목이 마르다는데’ 하며 즉석에서 수박 탈취 작전을 개시했다. 즉 두 명의 15기 회원들로 하여금 과일가게 양쪽에서 망을 보도록 하고 한 명의 15기 회원을 시켜 주인과 흥정을 하도록 한 후, 가게 앞쪽에 있던 수박을 집어 들고 달린 것. 이 후 학교 안까지 무사히 도망쳐 온 이종재와 그의 일당들은 수박을 맛있게 먹었다. 이종재 회원이 주인에게 다음 날 수박값을 지불했는지 안했는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 여름 방학과 RRC 조기회◀

 

  1978년 여름, 14기 박종언 회원에 의하여 제창된 RRC 조기회는 하기캠프를 앞둔 시점에서 RRC인들의 단합과 체력단련을 위하여 7월초부터 약 3주간 개최되었다. 참가자는 주로 1,2 학년들로서, 박종언, 이종재, 정원찬 (이상 14기), 임동일, 윤석윤, 윤화영, 백성일, 박용란 등의 회원들이었다.

 

  아침 7시까지 공대앞 승천암에 집결하여 체육교육과 박용란 회원의 지도로 체조를 하고, 백양로를 오르내리며 조깅으로 몸을 푼 뒤, 텅 비다시피 한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고 나서 RRC 단골 분식집인 한샘분식에서 라면을 먹는 것으로 행사를 마쳤다. 운동을 하고 난 뒤어서 모두들 식욕이 좋아 라면이 나오기 전에 단무지와 김치를 모두 먹어버렸고, 라면이 나올 때 쯤에는 새로 단무지와 김치를 공급받을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먹는 것에 대한 조기회원들의 집착은 대단해서, 유일한 여자 조기회원이었던 박용란 회원은 라면에 파리가 빠지자, "에이" 하더니 젓가락으로 집어 내고 다시 라면을 끝까지 먹은 일도 있다.

  조기회는 늘어지기 쉬운 여름 방학 때 회원들의 활력소가 되었고, 아침 운동 후 적당히 갈 곳도 별로 없던 조기회원들은 서클룸에 모여 캠프 준비를 열심히 할 수 있어 서클로서는 이래저래 이점이 많았던 행사였다. 조기회의 멤버들은 대부분 캠프 선발대에서 크게 활약을 하였으며, 1980년대 RRC 농우회를 만들어 농구에 대한 열정을 계속 이어가게 된다.

 

▶ 14기 정원찬 회원의 가요제 참가◀

 

  1977년 1회 MBC 대학가요제가 예상보다 큰 인기를 얻자 라이벌 TBC (방송통폐합에 따라 1981년 1월1일부로 KBS2로 변경)에서도 대학생들을 위한 가요제를 열기로 하였다. 약간의 차별화를 위해 TBC 소유 연포해수욕장에서 개최하기로 하고 ‘해변가요제’라고 이름을 붙였다.

 

  한편, 3월 무악골잔치를 시작으로 활동을 시작한 아마츄어 그룹 Fevers는 8월 한달 대천에서 텐트를 치고 음악연주를 해주는 일을 하기로 계획하고 있었으나, 사정에 의하여 이 일이 무산되자 꿩 대신 닭이라는 생각에 방향을 대천에서 연포로 바꾸기로 하고, Keyboard를 치고 있던 14기 정원찬 회원이 만든 '그대로 그렇게' 를 들고 참가하였다.

 

  1978년 7월 22일 (하기캠프 2일 전) 연포에서 개최된 해변가요제에서 Fevers는 인기상(3~5등에 해당)을 차지했고 상금 10만원을 받았다. 최우수상에는 '여름' (징검다리, 왕영은 참가), 우수상에는 '구름과 나' (블랙테트라, 구창모 참가), 다른 인기상 2 곡은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Runway, 배철수 참가), '그 바닷가' (벗님들, 나중 그룹 벗님들 멤버 1명 참가) 등으로서 나중에 유명해진 가수들이 많이 참가한 가요제였었고, 개그맨 주병진도 입상을 못했으나 당시 본선까지 진출하였었다.

 

  Fevers는 그 후 아마츄어 그룹에서 본격적인 직업 그룹으로 발전하여 음반, 방송, 리사이틀 활동들을 활발하게 벌이게 되었고, 해변가요제는 1979년부터는 '젊은이의 가요제' 로 이름을 바꾸어 서울에서 1980년 TBC가 해체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 가장 길었던 프로그램◀

 

  1978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서클 대표자 수련회가 열렸다. 2학기를 맞이하여 학도호국단 (현재의 총학생회) 임원들이 바뀌고, 대부분의 서클 대표자들이 바뀌면서, 1년 동안의 학생활동에 대하여 토론하는 자리였으나, 사실은 서클 대표자끼리 서로 얼굴을 알자는 형태의 1박2일 MT였다. 각 서클 당 1명씩의 대표가 참석하였으나 RRC는 대표자 1명, 사회자 1명으로 14기 조성표 회장과 정원찬 회원이 참석하였다. 저녁 식사 후 학도호국단의 1년 운영 설명이 있고, 각 분과별 토의를 마친 후 모두 한자리에 모여 서로 친해지는 프로그램을 1시간 정도 진행한 후 잠자리에 들 예정이었다.

 

  예정된 대로 7시까지 저녁식사를 맛있게 먹고, 한자리에 모여 8시까지 학도호국단의 1년 행사 계획과 응원단의 연고전 응원계획을 잘 들었다. 9시까지는 각 분과별 토론이었으나 RRC가 속한 교양취미회에서는 별로 토의할 것이 없었다. 서로 서클 소개를 하고나니 9시 30분이었는데 서로 다른 서클에 관심을 가질 것도 없었고 공통 관심사도 별로 없었다. 분과토의가 끝나는 10시까지 시간이 남아, 교양취미회끼리만 먼저 간단히 sing along을 하기로 하고 간단한 노래를 몇 개 불렀다.

 

 10시가 되고 30분이 더 지나도 다른 분과 (종교, 이념 등등)에서는 모이기로 한 장소에 오질 않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하여 한사람이 가서 확인한 결과, 분과 토론이 열을 띄어 계속 침을 튀기고 삿대질하며 진행되고 있다는 것. 할 수 없이 30여명의 교양취미회 소속 서클 대표자들끼리만 친목 프로그램을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2시까지 총 2시간 30분동안 준비해 갔던 프로그램은 모두 사용되었다. 그래도 모자라 준비하지 않았던 프로그램도 모두 동원되었으나, 종교, 이념 서클 대표자들은 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사회자도 지치고, 사람들도 지치고, 하지만 그냥 기다리기는 뭣하고… 다리도 아프고 입도 목도 아팠던 사회자는 RRC인들이 모이면 많이 하던 제스츄어 게임을 하기로 했다. 양 팀으로 나누어 서로 상대방에게 10글자 이내의 문장을 내고, 그것을 상대팀의 1명이 나와 자기 팀에게 동작으로 알려주고, 그것을 맞추기. 지쳤던 사람들은 갑자기 활기를 띄며 열심히 게임에 참여하였고, 서서 기타치느라, 노래하느라, 게임 설명하느라, 떠드느라 기진맥진하던 사회자는 의자에 편안히 앉아 시간만 재고 결과만 알려주면 되었다. 어느 팀이 이겼고 현재 몇 대 몇이고 하는 것은 참가자들이 신이 나서 다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

 

  결국 프로그램은 2시경이 되어 모두 끝이 났다. 종교, 이념 서클 대표자들도 토론을 마치고 돌아와 간단히 서로 인사를 하고는 잠자리에 든 것. 약 4~5 시간 한 사회자가 한 자리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한 것은 가장 긴 프로그램으로 꼽힐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 이대 RSC와의 교류◀

 

  이화여자대학교의 Recreation 서클은 RSC(Recreation Service Club)라는 이름의 체육교육대학 단과대 서클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RRC와 RSC는 서로 행사가 있을 때 초대를 하기도 하고, 초대받아 가기도 하면서 유대관계를 갖고 있었고, 1978년 이후 교류가 활발해져 서로 recreaton 관련 (game등) 연구를 하고 발표를 하는 소규모 모임을 갖기도 하였다. RRC의 남자회원들은 RSC와의 교류를 상당히 좋아하였으나, 상대적으로 여자회원들은 별로 RSC를 탐탁히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1978년 이대 RSC에서 생긴일 한 토막.

 

  1978년 11월 RSC의 어떤 행사에 참가했을 때의 일이다. RSC의 프로그램 진행자는 태극기 노래 가사를 바꾸어 부르는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강아지가 바람에 펄쩍 뜁니다. 강아지는 우리말로 개새낍니다." 라고 바꾸어 부르는 것.

 

  즉,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합법적으로 욕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개인별로 지목하여 송아지, 망아지 등의 가사로 노래를 부르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RRC의 조용호 회원을 지목하여 과연 RRC가 다른 학교에 와서, 그것도 처음보는 많은 여자들 앞에서 욕이 들어간 노래를 할 수 있을지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얼굴은 얌전하고 착해 보이기만 하는 13기 조용호 회원.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러 좌중을 뒤집어 놓았다.

 

조용호 : "양 새끼가 바람에 펄~쩍 뜁니다."

 

RSC : "엥, 무슨 노랠하려고 그러나? 양아치라고 하려고 하나?"

 

조용호 : "양 새끼는 미국말로 sheep 새낍니다."

 

RSC :  "꺄~~~ㄱ"

 

▶ 신학대학 축제와 고 최용석 회원◀

 

  1978년 하기캠프가 끝난 후 회장을 맡았던 최용석 회원은 거의 서클룸에 나타나지 않았다. 1977년 가을 회장을 맡을 때부터 신장이 좋지 않았던 최용석 회원은 1년간 쉬지 않고 일한 끝에 신장이 심하게 악화되었고, 수술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어 11월 초부터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11월 중순, 연세대학교 신학대학 축제가 열렸고, 사회로는 최용석(13기), 조용호(13기) 등 신학과에 다니던 RRC 회원들이 맡도록 내정되었었다. 그러나 최용석 회원은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었고, 조용호 회원 혼자서 사회를 맡을 수 밖에 없는 실정. 그런데 축제가 시작될 무렵 환자복 위에 코트를 걸친 최용석 회원이 나타났고, 바로 기타를 잡고는 프로그램 진행을 시작하였다. 세브란스에서 몰래 빠져 나와 본인이 사랑하던 신학대학을 위해 역시 본인이 사랑하던 RRC를 대표하여 마지막 사회를 맡은 것이다. 프로그램은 잘 진행되었고, 계속 "좋다 좋다" 를 연발하고 같이 춤까지 추었던 최용석 회원은 행사 후 세브란스로 돌아갔다.

 

  병원으로 돌아가고 난 그날 밤, 최용석 회원의 상태는 급작스레 나빠졌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수술을 받아야 함에도 수술을 거부하였고, 신과대학 교수들이 수술비를 걷어주며 수술을 받으라고 설득하여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렇게 1주일을 버티던 최용석 회원은 11월 18일 끝내 운명을 달리하였다.

 

  서클 역사상 처음으로 회원을 잃은 RRC의 모든 회원들이 슬퍼하며 그를 떠나 보냈고, 특히 그가 회장으로 있을 때 의견 차이로 많이 다투던 회원들은 슬픔이 특히 더 하였다. 최용석 회원을 묻고 돌아온 날, 회원들은 그가 자주 가던 우정 막걸리집을 찾아가 그가 좋아하던 노래를 부르다 모두 통곡을 하기도 하였다.

 

  그를 보내고 한 달 뒤 그의 죽음을 주제로 한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 이란 노래가 만들어졌고, 최용석 회원이 최초의 무대 (무악골잔치)를 만들어주었던 그룹 Fevers는 이 노래를 1979년 5월 발표하였다. 그리고, RRC 회원들은 그 판을 최용석 회원의 무덤 앞에 파묻고 명복을 빌었다.

 

▶ 술, 술, 술◀

 

  항상 그렇듯이 1978년에도 RRC 인들은 술을 많이 마셨다. 신촌은 요즘도 술꾼들이 즐겨찾는 곳으로 꼽히지만 당시에도 막걸리집, 순대집에서부터 캬바레까지 종류별로 모두 갖추어진 곳이어서 연세인들은 시내 다른 곳에 거의 진출하지 않고 신촌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였다. 요즘과 다른 점은 당시에는 외부인들이 신촌을 넘나드는 경우가 많지 않아서 순수하게 연세인들이 신촌을 꽉 잡고 있었다.

 

  당시 RRC 최고의 단골 술집은 신촌 시장에서 버스 정류장 가깝게 있었던 Fedra. 11기 이동학 (체교) 회원이 거래를 트기 시작하여 오랫동안 RRC의 단골 술집 역할을 했었다. 1978년 당시 RRC와 Fedra의 관계는 최상이어서 RRC 회원들은 주인 아주머니가 없을 때는 직접 부엌에 들어가 술을 들고 나오고, 안주도 집어오고 하여 술을 마셨다. 당시 4~5살 이었던 주인 아주머니의 딸 정현이는 RRC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또한 주인 아주머니가 열심히 일할 때 옆에서 빈둥거리고 있던 주인 아저씨는 RRC 회원들이 가서 술을 한잔 건네면 기분이 아주 좋아져서 같이 테이블에 앉아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 현재에도 Fedra 아주머니는 당시 친하게 지냈던 RRC 회원들의 이름과 얼굴을 모두 기억하고, 찾아가면 반갑게 맞아주곤 한다.

  그 외에 RRC 인들이 즐겨 찾던 곳은 싼 안주 값으로 인기가 급부상하던 천지문과 우정 막걸리집이 있었으며, 요즘은 없어졌으나 시장 내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순대국집들도 RRC인들이 싼 값에 자주 찾던 곳이었다. 다방으로는 태양다방, 꽃다방, 복지다방, 대야성다방 등이 있었고, 다방에서 두 팀으로 나뉘어 Disk Jockey에게 음악을 신청하고 먼저 3곡이 나오는 팀에게 진 팀이 술을 사기로 하는 게임도 많이 애용되었다.

 

  당시, 주당으로는 11기의 박혜란 (아동)회원이 여자의 몸이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주량을 과시하였고, 그 외에 신종섭(12), 송영관(13), 한은경(14), 최세환(14), 이종재(14), 최영상(14), 남대식(15), 김형수(15) 등이 손꼽혔다. 현재 여자 노장 주당 중의 하나로 명성이 자자한 15기 박용란 회원은 입학 후 신입생 환영회 때까지 맥주 한 잔을 제대로 못 마셨으나, 14, 15기 회원들의 줄기찬 노력(?)에 힘입어 당당한 여자 주당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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