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89
2012.03.03 23:57

1982년의 R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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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2년 1학기 임원단과 회원들
 
  1982년 1학기의 RRC 임원단은 17기 멤버들이었다. 당시 3학년이었던 회장 남규택(경제), 부회장 이혜연(성악), 총무 정우인(금속)이 주축을 이루어, 기획부장 이상호(토목), 연구부장 선우영(화공), 관리부장 김종엽(기계)이 1981년 가을부터 RRC를 이끌고 있었으며, 17기는 인원수가 많지 않아, 이들 임원진 외에는 거의 서클룸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비하여 2학년이었던 18기 회원들은 상대적으로 많은 수가 서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song부장 김기성(국문), game부장 정주봉(사회), F.D부장 나진호(사회), Deco부장 김정태(토목) 등의 부장들과 조동신(정외), 정영철(경제), 황경희(간호), 이애경(화학), 주현옥(성악) 등의 회원들이 새로 입회한 19기 회원들과 잘 융화하며 서클을 운영해 나아갔다.

 

1982년 서클룸의 왕고참은 군에서 제대한 최종철 회원(11기, 금속)이 있었고, 이외에 14기 정원찬 (화공), 15기 김형수(경영), 백성일(전자), 윤화영(기계), 윤석윤(기계), 16기 김병훈(신방), 김상동(식공), 김심겸(법학), 정진영(행정) 등이 수적으로 부족한 임원단과 함께 적극적으로 서클 운영에 참여하였다.

 

 

2. 신입생환영회 (3/20)

 

  1982년 입회한 19기 회원들은 장길순(경제), 윤선우(행정), 이재권(기계), 안병기(토목), 조덕용(경제), 이희창(체교), 우영철(체교), 신동휘(영문), 이은아(간호), 정혜승(간호), 진혜경(의생), 차동숙(의생), 권민아(기악), 성혜영(아동) 등이 있었는데, 입학하면서부터 18기 회원들과 호흡을 잘 맞추어 원만한 서클 생활을 이루어 갔다.

 

  신입생환영회는 3월 20일(토)에 열려 새로 입회한 19기 회원들을 맞이하였다.

 

 

3. 춘계수양회 (3/27 ~ 3/28)

 

  1982년의 춘계수양회는 덕소 수양관에서 열렸다. 이날은 한국 프로야구가 처음 생긴 날로서 그 화려한 개막전인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9회말 이종도 선수의 만루홈런으로 대역전에 성공한 MBC 청룡이 프로야구 최초의 승리를 거둔 날이기도 하다.

 

  수양회의 조장은 김기성, 정영철, 정주봉, 나진호, 조동신, 김정태 등 18기 회원들이 맡아 재치있게 조를 운영하였으며, 저녁에 열린 촌극대회에서는 정주봉 조장이 이끈 조가 발표한 ‘이 여인을 어찌하오리까’라는 제목의 사회문제 고발 촌극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1막 3장의 기법을 선보이며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 촌극에서는 모든 조원을 참여시키기 위해 16기 김상동 회원을 쥐로 만드는 촌극을 빚어내기도 했다.

 

  저녁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서 F.D 부장 나진호 회원의 lead로 춤 시간이 이어졌고, 동네 막걸리로 술자리가 벌여져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4. 게임파티 (5/8)

 

 

5. 하기캠프 준비

 

  하기캠프의 준비는 초반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1978년부터 1981년까지 캠프장소로 사용하던 구래포가 군사지역으로 포함되어 캠프장소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 것. 이에 따라 남규택 회장은 14기 정원찬 회원과 함께 제부도를 답사하는 등 새로운 캠프장 찾기에 고심하였다. 그러나 마땅한 후보지가 나타나지 않아 결국 1974년부터 1977년까지 하기캠프장으로 사용하던 학암포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그 다음의 문제는 캠프 본부 편성이었다. 17기 인원이 얼마 되지 않는데다, 이상호, 선우영 등 임원들이 모두 개인 사정으로 캠프에 참가할 수가 없게 되어 17기 중 남규택(캠프장), 이혜연(생활), 정우인(총무), 김종엽(물품관리) 이상 4명 만이 본부인원에 포함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외의 본부 인원들은 선배들이 맡아서 하게 되었는데 캠프 프로그램 director에 정원찬(14), 야영장에 ROTC복무에서 갓 돌아온 조용호(13), 사진 담당에 선우광범(12) 등이 투입되었다.

 

  캠프 프로그램에서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5박6일로 진행되는 캠프에서 첫날의 ‘코이노니아의 밤’, 셋째날의 ‘경연의 밤’, 넷째날의 ‘원시종합예술제’, 그리고 마지막날의 ‘너와나 그리고 학암포’는 문제가 없었으나, 둘째날의 ‘민속제’에 대한 2학년(18기) 회원들의 반발이 상당히 컸던 것이다. 민속제는 1978년 6기 김승남, 14기 조성표 회원의 야심작으로 전래 놀이들을 모아 진행하여 호평을 받았으나, 이 후 새로운 방향 모색, 의미 부여 등에서 실패하여, 그 전 해인 1981년 민속제는 최악이라는 평을 받았던 것. 따라서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가 있었다.

 

  캠프의 프로그램들이 처음에는 본부에서 준비한대로 하다가 날이 가면서, 각 조별 발표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흐름이었는데, 둘째날 프로그램은 사실 성격 부여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둘째날에는 캠퍼들의 친숙도가 아직 정착되지 않은 단계에 있어, 아직 앞에 나서서 뭔가를 보여주기에는 약간 쑥스러운 분위기이기 때문에 각 조에서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프로그램은 문제가 있었고, 그렇다고 본부에서 준비한 내용만으로 진행하기에는 첫날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그 중간정도 되는 선에서 내용을 정하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둘째날의 프로그램 담당자는 18기의 유명한 이빨꾼 김정태(토목) 회원이 맡았는데, 김정태 회원과 PD 정원찬 회원은 며칠동안 머리를 굴리고 굴려 ‘오페라 모자이크’라는 프로그램을 생각해 냈다. 하나의 스토리 (1982년에는 춘향전)를 6토막 내어, 각 조 별로 하나씩 할당해 주고, 각 조별로 이를 오페라 처럼 노래로 처리하는 것이다. 스토리가 주어져 있기 때문에 새로운 스토리 개발에 애쓰지 않아도 되고 장면에 맞는 노래만 선정하여 부르면 되는 것이다.

 

  또 다른 변화는 점심 식사를 조별로 해결토록 한 것이었다. 캠프에서 전체 식사를 하려면 한 개의 조가 식사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아침 식사는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서 할 수 있고, 저녁 식사는 남들 씻고 쉬는 동안에 할 수 있지만, 점심식사 준비는 오전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도중에 하게 되기 때문에 곤란한 점이 있었다. 18기 김기성 회원의 제안에 따라 점심식사를 각 조별로 따로 준비하여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단, 모든 캠퍼들이 점심 준비를 하기 때문에 오후 프로그램은 전보다 더 느슨하게 진행하기로 하였다.

 

  캠프 fire를 위한 준비도 새롭게 이루어졌다. 마지막 날의 camp fire에서 그전까지의 점화 방식은 나무에서 석유에 묻힌 줄을 달아 불이 날아오도록 하는 방법, 석유를 입에 넣고 횃불에 뿜어 이 불이 날아가 점화되는 방법, 그냥 장작개비에 불을 붙여 점화하는 방법 등이 있었다. 그러나, 1982년에는 염소산칼륨과 탄소가루를 섞는 방법으로 도화선 가루를 만들어 연보라색의 예쁜 불꽃이 타들어가는 방식을 선택하고, RRC의 화공과 출신들이 모여 제작을 하였다. 우선 기사 자격증이 있었던 13기 백치옥(화공) 회원이 KClO3 (염소산칼륨)을 구입하고, 여기에 탄소 가루를 섞어 도화선 가루를 만드는 작업을 14기 정원찬(화공) 회원과 17기 선우영(화공)회원이 맡아 하였다. 만들어진 가루를 장작더미까지 연결하는 방법이 가장 문제였는데, 테이프 등에 가루를 바를 경우 너무 얇게 붙어 불꽃 효과가 덜 하였고, 그냥 가루를 모랫바닥에 뿌릴 경우 모래와 섞여 도화선이 중간에 끊어질 염려가 있었다. 그래서 신문지로 관을 제작하여 그 사이에 넣기로 하고, 여러 번 실험을 하여 신문지 관의 가장 적합한 두께를 정하였다.

 

 

6. 하기캠프 (7/19 ~ 24)

 

  82년 하기캠프 본부는 캠프장 남규택(17기), 부캠프장 및 생활부장 이혜연(13기), 총무 정우인(17기), 프로그램부장 정원찬(14기), 야영장 조용호(13기), 물품관리 김종엽(17기), 사진 선우광범(12기) 등으로 이루어졌다. 각 조는 18기의 조장들에 의하여 운영되었는데, 주조(김기성), 화조(나진호), 수조(정주봉), 의조(조동신), 무조(김정태), 식조(정영철)등이 그 이름이었고, 각 조에는 대략 12~14명의 인원들로 구성되었다. 1982년에는 선배들이 많아 각 조별로 선배들이 1명씩 할당되었는데, 최종철(11, 식조), 김정삼(13, 의조), 백성일(15, 화조), 윤화영(15, 주조), 안형근(16, 무조), 김병훈(16, 수조), 김상동(16, 화조), 김심겸(16, 의조) 등이 각 조에서 활약하였다.

 

  캠프의 밤 프로그램은 월요일 ‘코이노니아의 밤’(진행 김기성), 화요일에는 ‘오페라 모자이크’(진행 김정태), 수요일에는 ‘촌극대회’(진행 정영철), 목요일 ‘원시종합예술제’(진행 나진호), 금요일 ‘너와나 그리고 학암포’(진행 정원찬) 등이었다. 저녁 프로그램은 모두 원활히 진행되었는데, 특히 화요일 밤의 오페라모자이크는 막과 막 중간중간에 진행자 김정태 회원의 즉흥 멘트가 분위기를 살리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또한 마지막 날의 캠프 화이어 시간에서는 도화선으로 이루어진 멋진 점화에 이어, 전 캠프원에게 캠프장과 부캠프장이 막걸리를 따라주며 대화를 하는 시간도 있어 좋은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목요일 원시종합예술제에서는 이혜연(17), 권민아(19) 두 여자 회원이 무서운 분장을 한 토인들을 보고 놀라 울음을 터뜨리는 사건이 발생하여, 학암포의 쌍곡소리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다.

 

  낮 프로그램은 Little Olympic(진행 정주봉)이 오전에 진행되었고, 점심시간에는 처음 도입된 조별 취사가 캠퍼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며, 오후에는 느슨하게 조별 모임이나 낮잠 시간이 이루어졌다. 단 금요일 낮에는 전에 없었던 추적놀이(orienteering)가 생겨 좋은 반응을 얻었다. 추적놀이는 지도를 보고 방위각과 거리를 이용하여 정해진 곳을 찾아가 그곳을 지키고 있는 postman에 의한 간단한 놀이 (제스츄어 게임 등)를 하고 정해진 곳을 모두 돌아오는 것으로서, 1982년 이후 캠프의 주요 낮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다.

 

  1982년 추적놀이의 문제 출제는 군에서 제대한 지 얼마 안되는 포병장교 출신 선우광범(12), 작전장교 출신 조용호(13), 중대 작전병 출신 정원찬(14)의 세 사람이 맡아 군에서 배운대로 문제를 출제 했는데, 이 문제를 잘못 해석한 모 회원이 자기 조원들을 멀리 구래포까지 데려가는 바람에 웃음을 자아내었다.

 

  1982년의 캠프 분위기는 대체로 부드러웠으며 18기 6명의 조장들은 각자 자기 조 내에서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였고, 조의 분위기를 잘 살려 재미있는 캠프 생활을 이끌었다.

 

  1982년 본부 텐트에는 최종철(11), 선우광범(12), 조용호(13), 정원찬(14), 백성일(15), 김병훈(16) 등 선배들이 있었는데, 우연히도 기수마다 1명씩 선발한 것처럼 모여, 재미있는 분위기를 많이 만들어내었다. 점심시간 또는 휴식시간에 장난으로 군기잡는 분위기를 만들어 캠퍼들은 각자 텐트 앞에서 재미있는 코미디를 보듯이 이를 구경하였다. 이들의 군기는 아주 철저하여, 모든 사람이 자리를 비우고 최종철, 선우광범 두 회원만 남게 되면, 최종철(11) 회원의 명에 따라 선우광범(12) 회원이 심부름으로 물건을 사오기도 하였다. 물론 사람들이 다 돌아오면, 자기만 남겨두고 모두 자리를 비웠다고 선우광범 회원에 의한 얼차려 (장난스러운 것)가 이어지곤 했다.

 

  이들은 또한 ‘하기캠프 예비군중대’, ‘하기캠프 민방위대’, ‘하기캠프 정화추진위원회’라는 팻말을 걸어 놓고 캠프의 부정부패를 감시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그 한 예로 Little Olympic이 진행될 당시 조용호, 정원찬 회원은 격구 경기의 심판을 맡았고, 경기가 끝난 후 승리한 팀으로부터 쭈쭈바를 얻어 먹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곧바로 정화추진위원회에 보고되어 조용호, 정원찬 심판들이 쭈쭈바를 먹고 본부로 돌아오자 마자 바로 재판이 열렸고, 뇌물을 얻어먹은 것으로 판정되어 점심시간에 ‘나는 다시는 뇌물을 받지 않겠습니다’라는 팻말을 들고 각 조를 돌아다니는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

 

  식사 준비는 생활부장인 이혜연의 담당이었으나, 불을 피우고 때는 일은 선배 화부들이 맡아 하였다. 수석화부 백성일(15)을 중심으로, 불 때는 실력에 따라 차석화부 김상동(16), 수석조수 김병훈(16), 면허증 없는 화부 김심겸(16) 등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서 화부의 역할이란 단순히 불을 때고 음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식사당번 조들을 심심하지 않게 즐겁게 해주는 역할과, 밥 타러 온 사람들 줄 세우고 군기잡는(장난으로) 일도 맡아서 하였는데, 밥을 타러 온 사람들은 수석화부 백성일(15)의 우수한 이빨에 배꼽을 잡곤 하였다.

 

  종합 1위는 김기성 조장을 중심으로 한 주조와 정영철 조장의 식조가 공동 우승을 하였으며, 프로그램 진행 면에서 라이벌관계(?)에 있었던 두 사람은 돌아오는 버스에서도 같은 버스를 타고 최후까지 조별 경기를 벌이며 팽팽한 접전을 유지하였다.

 

 

7. 1982년 2학기 임원단과 회원들

 

  하기캠프를 마치고 9월에 들어서면서 17기 임원단의 임기가 만료되고, 18기 회원들이 임원단을 맡게 되었다. 18기는 인원도 많았고, 능력있는 회원들도 많아 별 무리없이 임원단 선정을 마칠 수 있었다.

 

  이리하여 결성된 18기 임원단은 회장 김기성(국문), 부회장 황경희(간호), 총무 나진호(사회), 편집/데코 김정태(토목), 기획/관리 정주봉(사회), 연구 정영철(경제) 등이었다.

 

  또한 연구부 산하의 15기 부장들로는 song부장 윤선우(행정), game부장 장길순(경제), FD부장 이희창(체교) 등이 선발되었다.

 

 

8. R-day Party (9/4)

 

  서클 탄생 12주년을 기념하는 R-day Party가 9월 4일 개최되어 많은 선후배들이 모여 서클의 생일을 축하하는 기회를 가졌다. 1982년의 R-day Party에는 새로운 순서가 하나 추가 되었는데, 서클 중창단의 축가가 바로 그것이다. 1982년 여름방학 때 만들어진 중창단 ‘이혜연과 곡소리’는 RRC 회원들 중 노래를 잘하는 사람으로 구성된 혼성복사중창단으로서 소프라노에 이혜연(17,성악), 주현옥(18,성악), 앨토에 권민아(19,기악), 이윤경(19,기악), 테너에 정원찬(14,화공), 정영철(18,경제), 베이스에 윤선우(19,행정), 이재권(19,기계)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Swing Low Sweet Chariot’, ‘들에 핀 저 꽃들은’, ‘작은 세상’ 등을 데뷔 무대에서 선보였다.

 

 

9. 추계수양회 (10/2 ~ 3)

 

 18기 임원단의 첫 행사인1982년의 추계수양회는 청평유원지에서 열렸으며, 많은 수의 19기 1학년 회원들이 참가하여 우의를 다진 행사였다.

 

  6개조로 나뉘어 가진 촌극대회에서는 우수한 작품들이 많이 소개되었는데, 19기 이희창 회원을 장님 주인공으로 설정한 ‘푸른 하늘이 보고 싶어요’는 배경 음악, 조명 등을 적절히 활용함과 동시에 주인공 이희창 회원의 뛰어난 연기력이 어우러지면서 압도적인 우세로 1위를 차지하였다. 특히 마지막 부분 사형장에서 Amzaing Grace의 경음악이 들리며 조명이 주인공을 비추는 가운데, ‘하느님 푸른 하늘이 보고 싶어요’라는 독백을 하다가 사형을 당하고 죽어가는 이희창 회원의 연기는 두고 두고 이야기거리가 되었다. 이후 수양회 및 캠프에서의 촌극에는 조명과 음악이 거의 필수적으로 유행된 일이 있었다.

 

  R-day Party가 RRC 중창단의 데뷔 무대였다면 추계수양회는 RRC 그룹사운드의 데뷔무대였다. ‘김기성과 개과천선’이라는 이름의 그룹사운드는 기타 김기성(18), 베이스 정영철(18), 키보드 권민아(19), 드럼 정원찬(14), 싱어 김형수(15)로 구성되었는데, 신촌의 음악연습실에서 한두번 연습을 하며 준비를 하여, 추계수양회의 밤 프로그램 마지막 마지막 순서로 화려하게 데뷔를 하였다. 연주곡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연’, ‘어쩌다 마주친 그대’, ‘엘도라도’,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Surfin’ USA’ 등이었으며, RRC 회원들의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10. 푸른샘 운영 (11월 어느 날)

 

  1982년부터 학생회에서는 봉사활동을 하는 서클들이 1주일씩 돌아가면서 학생회관 3층의 푸른샘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여기서 나오는 수익금을 모두 봉사자금으로 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푸른샘은 학생들에게 과자와 차 등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였고 다방처럼 disk jockey가 있어 신청곡도 받아 틀어 주었다.

 

  이 푸른샘 운영을 위하여 부회장 황경희(18) 회원을 중심으로 한 여자 회원들은 주방에서 컵 닦고 차 준비하는 일, 남자 회원들은 주문 받고 차와 과자를 날라다 주는 일, 임원단은 돈 받는 일을 맡아 하였다. 그리고 선배들은 각자 가지고 있는 음악들을 모두 동원하여 tape를 준비하고 서로 돌아가면서 disk jockey를 맡기도 하였다.

 

  1주일동안의 힘든 푸른샘 운영이 끝난 토요일에는 문을 걸어 잠그고 수고한 회원들끼리 모여 봉사자금 마련 자축 파티를 열기도 하였다.

 

 

11. 동계봉사 (1983. 1.16 - 23)

 

 

12. 1982년에 있었던 각종 사건들

 

▶ 환송회 해프닝

 

  1982년 5월 경 15기 윤석윤 회원이 입대하였다. 물론 회원들이 모두 모여 성대한 환송회를 열어주었다. 그런데, 약 2 주일 뒤, 윤석윤 회원이 다시 서클에 나타난 것. 이유는 신체검사 불합격이었다. 입대 전 신체검사에서 머리를 약간 이상하게 돌린 상태에서 키를 잰 결과는 187cm (원래 키는 189cm) 였고, 입대 후 신체검사에서는 190cm 가 나온 것. 당시의 군의관은 ‘3개월 사이에 3cm 가 자란 것과, 얼굴 생김새로 보아 거인증임에 틀림없다.’라고 판정을 하여 윤석윤 회원을 되돌려 보낸 것이었다.

 

  그로부터 1달 뒤 16기 정진영 회원도 입대를 하였다. 정진영 회원도 입대 후 2주일만에 다시 돌아와 RRC는 2달 사이에 2번의 환송회와 2번의 환영회를 하였다.

 

  그리고 하기 캠프가 끝난 후 17기 선우영 회원의 미국 유학 환송회가 있었다. 이것은 한 번 가면 오래도록 볼 수 없는 것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의 성공을 빌었다. 그리고 1달 후, 노천극장에서 연고전 응원연습을 하던 중 선우영 회원이 나타났다. University of Washington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의 교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course 내용과 자신이 하고자 했던 바가 일치하지 않은 것을 발견한 선우영 회원이 본국의 학과에 연락을 하여, 유학을 포기하고 2학기에 복귀하기로 한 것.

 

  여러 번 환송회에서 헛물을 켠 RRC 회원들은 앞으로 누가 멀리 떠난다고 하면, 우선 보내놓고 1달을 기다려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경우에 한해서 환송회를 열자는 말을 하곤 하였다.

 

▶ 곡소리 중창단의 탄생

 

  1982년 하기캠프를 마치고 서클에는 열성회원들이 몇 명씩 모여 놀다가 저녁 때는 술을 마시러 가곤 하였다. 8월 초 경에 시장 근처에 있었던 텅빈 xx전골집(세운당구장 밑에 있었음)에서 술을 마시던 정원찬(14), 남규택(17), 김기성(18) 등 회원들은 이야기를 나누다 TV를 보다가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때 문이 열리며 5~6명의 남녀가 들어와 한쪽 구석에 앉아 음식을 주문하고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약 30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한쪽 구석에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아주머니 TV좀 꺼 주실래요?’라고 하였고, 무슨 일인가 하고 돌아다보니, 한 사람이 기타를 들고 연주를 시작하는 것이었고, 곧 이어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들려왔다.

 

  단순히 술집에서 시끄럽게 구는 패거리들이 아닌가 하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던 RRC 회원들은, 막상 그들의 입에서 나온 노래가 고운 화음으로 잘 어우러진 합창인 것을 깨닫고, 숨을 죽이며 조용히 감상하게 되었다. 단 두 패거리만 있는 조용한 술집에서 한 패는 노래를 부르고 다른 한 패는 꼼짝않고 노래를 듣는 분위기가 한동안 계속되었고, 약 30분 정도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은 주섬주섬 물건을 챙겨 나가 버렸다.

 

  크게 감동을 받은 회원들은, RRC에서도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을 모아 중창단을 만들어, 서클 행사 때마다 축가를 부르자는 의견이 나왔고, 즉시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다. 정원찬(14) 회원이 쉬운 것부터 노래들을 모아 편곡하고, 중창단원들을 모집하였다. 당시 서클에는 음악대학에 재학중인 여자 회원들이 많아 여성 part를 구성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남자 단원들이 문제였는데, 서클에서 노래를 제법 잘 하거나 성가대 등의 활동을 해 본 사람들을 중심으로 모집하였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 소프라노 이혜연, 주현옥, 앨토 권민아, 이윤경 (R-day Party 후 성혜영으로 교체), 테너 정원찬, 정영철, 베이스 윤선우, 이재권 이었으며, 기타 반주는 김기성 회원(후에 정원찬 회원이 테너에서 빠진 후 윤선우 회원이 테너로 이동, 김기성 회원은 베이스로 활약)이 맡아 하기로 하였다.

 

  중창단 이름은 가장 노래를 잘하는 이혜연 회원을 앞세우되 1982년 하기캠프에서 유명했던 학암포 쌍 곡소리를 상기하는 의미에서 ‘이혜연과 곡소리’라고 붙였다. 또한 곡 선정은 기존의 어려운 합창/중창 곡들을 탈피하여, 평소에 많이 들을 수 있는 노래들을 골랐고, 이들을 나름대로 편곡, 독특한 색깔을 내는 방향으로 하기로 하였다.

 

  편곡해 온 악보를 학교 앞 복사점에서 복사하여 여름방학이 끝날 때까지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여, 9월의 R-day party에서 화려한 데뷔를 하였다. 그 이후 졸업생 환송회, 신입생 환영회 등의 행사에서 곡소리 중창단은 계속 활약을 하였고, 정원찬 회원이 미국 유학을 떠난 1984년부터는 군에서 제대한 15기 임동일 회원이 합류하여 이끌어 갔다.

 

  이들이 부른 곡은 ‘Swing Low Sweet Chariot’, ‘들에 핀 저 꽃들은’, ‘작은 세상’, ‘뭉게구름’, ‘꽃과 어린 왕자’, ‘주는 나의 목자’, ‘천리길’, ‘그대 처음 바라본 순간’, ‘내가’, ‘어제 내린 비’ 등이었는데, 모두 당시의 회원들이 잘 아는 노래를 골라 다른 맛이 나도록 편곡한 것이었다.

 

▶ 김기성과 칠면피

 

  1982년 가을, 어느 보름에 달구경하러 남산에 가는 행사가 있었다. 행사가 모두 끝나고 나서 집에 가기 싫어하는 7명의 술꾼들이 있었으니, 김기성(18), 정주봉(18), ???, 윤화영(15), 윤석윤(15), ???, 정원찬(14)의 7명이었다.

 

  이들은 일단 남산에서 내려와 신세계 백화점 옆의 디스코텍으로 향했다. 이 곳은 정원찬(14)회원이 예전에 Fevers에서 활동할 때 팀의 싱어로 있던 이명훈이 노래를 부르는 곳으로서, RRC 회원들이 정원찬 회원을 앞세우고 찾아가 공짜술을 먹곤 하였다. 그러나, 그날따라 일찍 순서를 끝낸 이명훈은 다른 곳을 가고 없는 것이 아닌가? 모두 힘이 빠져 신세계백화점 앞 길에 주욱 늘어져 앉아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 받다가, 누군가가 ‘신촌으로 가자’고 했고, 모두가 갑자기 힘을 얻어 일어섰다.

 

  우선 효율적인 돈 관리를 위하여 모두가 가진 돈을 한곳으로 모으기로 하였다. 이렇게 7명이 모은 돈이 3,500원 정도. 그리고 7명은 20원씩 배급을 받아, 일렬로 늘어서 있는 공중전화에서 집에다 못 들어간다는 내용의 전화를 하고, 신촌행 좌석버스를 탔다. 당시 좌석버스 요금은 350원, 7명이면 1750원이었다. 그러나, 모은 돈의 반을 교통비로 날릴 수는 없는 일, 6명이 앞에 내리고, 맨 뒤에서 김기성 회원이 안내양(당시에는 버스에 안내양이 돈을 받았음)에게 통사정을 하여 700원만 내고 내렸다.

 

  신촌에 도착하자 뚜렷한 이유도 없이 활기가 솟았다. 그리하여, 뻔뻔스럽게도 당시의 인기가수 이용이 나와 노래하는 디스코텍을 찾아 들어갔다. 여기서도 김기성 회원이 웨이터에게 얘기를 잘 하여 남은 돈 전부와 학생증 1개를 맡기고 해결을 보았다. 사실 김기성 회원은 얼굴도 멀끔하게 생긴 데다가 불쌍한 표정을 아주 잘 짓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동정을 살 수가 있었다.

 

  새벽 4시까지 맥주를 실컷 마시고 춤도 추고 나온 7명은 갈 곳이 없었다. 신촌을 한참 배회하다 보니 불켜진 당구장이 보였다. 불빛에 힘을 얻은 7명은 당구장으로 들어가 시계 1개를 맡기고 3시간 동안 당구를 칠 수 있었다.

 

  훤히 날이 밝은 아침에 당구장에서 나온 7명은 배가 고팠으나, 무엇하나 사먹을 수가 없었다. 또다시 신촌을 배회하다 보니 독수리 다방 맞은 편 골목에 새로 생긴 분식집 (티롱분식) 아주머니가 문을 열고 청소를 하는 것이 보였다. 다짜고짜 청소를 도와 드리고 나서, 학생증을 맡기고 수제비를 먹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졸랐다. 아주머니는, 학생들이 학생증이 없으면 어떡하느냐며 담보 없이 외상으로 수제비를 제공하였다. 이후 티롱분식은 RRC의 단골 분식집이었던 한샘분식을 제치고 RRC 제1의 단골 분식집이 된다.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도 아직 학생증이 남은 7명은 기왕 나선 김에 커피도 마셔보자고 다시 신촌을 배회하다가 막 문을 연 복지다방을 보았다. 다방이 문을 열면 우선 환기도 하고, 창문도 닦는 법. 무조건 들어가 함께 창문도 같이 닦고 탁자 정리도 하였다. 주인이 와서 왜 그러느냐고 묻자, 외상으로 커피를 마시게 해 달라고 졸랐다. 그러자, 주인은 개시 손님이라서 안된다며 막무가내. 불쌍한 표정을 열심히 지어 보이던 7명은 결국 쫓겨나 복지다방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약 5분 정도 앉아 있었을까? 이들의 눈앞에 19기 회원으로 등록하여 잠시 서클에 나오다가 나오지 않던 1학년 여학생이 보였다. 이 여학생에게 다가간 정주봉 회원은 5천원을 빌리는데 성공했고, 7명은 5천원짜리 1장을 살랑살랑 흔들며 복지다방 안으로 입성하였다. 창문을 닦던 다방 아가씨들이 박수로 환영하여 주는 가운데…

 

  커피까지 마시자 다시 당구가 치고 싶었고, 이들은 당시 RRC 단골이던 세운 당구장 아저씨 집으로 가서 열쇠를 받아 당구장 문을 열고 한낮까지 실컷 당구를 쳤다. 당구를 다 치고 나온 이들은 세운 당구장 앞에서 ‘다 이루었다 !!’ 라며 좋아하고는, 두 패로 갈라져 집으로 향했다. 이렇게 갈라진 두 패거리 중 한 패거리는 버스 정류장으로 가던 중 점심 먹으러 나온 다른 회원들을 만나 점심까지 얻어 먹고는 ‘더 이루었다 !!’ 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 후 RRC에서는 이들을 7명의 철면피라는 뜻으로 ‘김기성과 칠면피’라고 불렀다.

 

▶ RRC 인들이 잘 가던 곳

 

  70년대 RRC인들이 가장 많이 찾은 곳이 Fedra였다면, 80년대 초반 RRC인들이 가장 많이 찾은 곳은 세운당구장이었다. 세운당구장은 17기 남규택 회원이 거래를 트기 시작하여, RRC 회원들이 낮이나 밤이나 애용하던 곳이었다. 술마시려고 모이는 곳도 세운당구장이었고, 술마시다가 와서 당구 치는 곳도 세운당구장이었다.

 

  아침 일찍이 당구가 치고 싶으면 세운당구장 아저씨 집에서 열쇠를 받아다가 당구장 문을 열고 치기도 했고, 서클룸에 갔다가 사람들이 없으면 세운당구장으로 찾아가 사람들을 만나든지, 아니면 아저씨에게 물어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내곤 했다. 때로는 2 패의 RRC 회원들이 시간차를 두고 모여 당구를 치고 술 마시러 가는 적도 있어서, 그런 경우 세운아저씨는 누구누구는 몇 시에 어디로 갔고, 누구누구는 몇 시에 어디로 갔다고 얘기해 주곤 하였다. 그럴 때는 마음에 드는 모임을 찾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세운 아저씨는 Fedra 아줌마와는 달리 외상을 철저하게 받아내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잊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누가 군대를 간다든지, 유학을 떠나면 그 사람을 집에 데려가 대접을 하며 환송을 해 주기도 하였다.

 

  1982년 RRC인들은 당구 이외에 전자오락에도 심취하였다. 1982년 1학기 말 경에 선을 보인 Gallaga는 대단한 인기를 모았으며, RRC에도 이에 빠져 몇 시간 씩 오락실에서 죽치는 사람도 있었다.

 

  전자오락의 역사는 1977년 겨울 축구 게임 (흑백으로 된 모니터에서 공을 주고 받고 하는 2인 게임)에서부터 시작되어, 본격적인 오락실이 생긴 1978년 블록 격파를 거쳐 Space Invader, 오목, 너구리 등의 게임이 있었으나, 1982년의 Gallaga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게임은 없었다. 오른손으로 얼마나 빨리 총을 쏘느냐를 연습하려고 평소에도 오른손 검지를 부르르 떠는 연습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총을 쏠 때는 오른손 검지를 떨어야 총알이 빨리 나감) 당시 전자오락의 대가로는 15기 백성일 회원과 19기 정혜승 회원이 꼽힌다.

 

▶ 술에 얽힌 이야기

 

  1982년에도 RRC 인들은 술을 많이 마셨다. 언제는 안 그랬던가?

 

  70년대 RRC 최고의 단골 술집이던 Fedra는 이념 서클 학생들이 많이 찾아와 토론을 많이 하면서 자리가 없는 경우가 자주 있었고, 이래서 RRC의 발길이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여러 개의 단골 술집들이 생겼는데, 아무래도 70년대의 RRC와 Fedra 같은 끈끈한 유대관계는 아니었다.

 

  RRC 인들이 즐겨 찾던 곳은 시장 옆 세운당구장 아래의 ??전골집으로서 해물전골 등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시는 곳이었다. 그리고, 당시 삼겹살이 유행하면서 시장에서 학교 쪽으로 생긴 뒷골목의 만미집, 풍년집 등에서 삼겹살이나 돼지갈비를 먹는 일도 많아졌다. 또한 20~30 명이 단체로 찾아가는 곳 중 가장 만만한 곳은 중국집이었는데, 신촌 반점이 가장 빈번히 찾은 곳으로서, 짬뽕 국물이 가장 주된 안주였고, 군만두가 나오면 먼저 먹으려고 젓가락 싸움이 치열하였다. 이 때 맹활약을 떨친 사람은 무협지와 중국 무술 영화를 섭렵하던 15기 윤화영 회원인데, 하나의 안주를 집어 먹은 사람이 술을 마시지 않고 또 먹으려고 하면, 입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며 (무술영화에서 나오는) 자신의 젓가락으로 그 젓가락을 잡아 안주를 함부로 먹지 못하게 하였다. 따라서, 윤화영 회원은 안주 감시원으로서 술값을 내는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높았다.

 

  1차를 하고 나서 2차로 맥주를 많이 마시던 일도 이 즈음에 생겨난 일이었다. 1981년 생맥주 전문점인 OB 베어, 크라운 family 등이 생기고 생맥주가 많은 인기를 누렸고, 또한 닭튀김 (Fried Chicken)을 안주로 하는 집에서 생맥주를 마시는 일도 많았다. RRC에서 가장 닭을 좋아하던 사람들은 17기 남규택, 19기 조덕용이었는데, 이들은 각각 남규닭, 조닭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당시, 주당으로는 17기의 남규택, 선우영 회원이 손꼽혔고, 14기 정원찬, 15기 김형수, 15기 백성일, 18기 김기성, 19기 우영철 등의 회원들도 술을 많이 마셨다.

 

  R-day Party, 신입생환영회, 졸업생환송회 등의 행사가 끝나면 40~50명이 둘러 앉아 저녁도 먹고 술도 마실 수 있는 곳에서 after (뒷풀이)가 있었다. 얼마 정도 술을 마시면 의례 돌아가면서 노래들을 한 곡 씩 하곤 했는데, 노래를 못하는 대표적인 회원들로 17기의 회장, 총무인 남규택, 정우인 회원들이 있었다. 이들은 박자, 음정이 가끔씩 맞기도 하는 전형적인 음치들인데 서로 라이벌의식이 강하여, 이들 중 한 사람이 노래 부른 후 혹시라도 ‘전보다 나아졌다’ 라는 긍정적인 평을 받으면, 다른 한 사람이 일어나 ‘쟤 보다는 내가 낫다’라며 노래를 부르고, 그러면 먼저 불렀던 사람이 다시 일어나 ‘그래도 내가 낫다’라며 노래를 불러, 모인 사람들은 한참동안 이들의 노래를 듣고 있어야 하는 곤욕을 치렀다.

 

▶ 당시의 연세 소식, 사회 소식

 

  1982년은 당시 정권에서 많은 부분의 제약을 풀어주던 시기였다. 통행금지가 1982년 초부터 없어졌고, 유학자율화가 이루어졌다. 또한 프로야구가 출범하였고, 축구, 씨름 등의 프로화도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여, 모든 분야에서 약간 들뜬 사회 분위기였다. 반면, 학교에서는 이념 서클 등을 중심으로 데모도 많이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한 경찰들의 활동도 활발하였다.

 

  당시 최고의 인기는 막 출범한 프로야구였다. 서울, 인천, 대전, 대구, 광주, 부산의 6대 도시를 중심으로 프로팀이 생겨 났고, 자기 지역의 팀을 응원하는 것 뿐 아니라, 라이벌 제품을 사지 않는 것, 나아가 지역감정으로까지 번질 만큼 프로야구의 열기는 대단하였다. 개막전에서 이종도의 끝내기 역전 만루 홈런으로 화려하게 막을 열었던 프로야구는 마지막 한국시리즈에서도 김유동의 역전 만루 홈런으로 화려하게 막을 내렸다.

 

  또 하나 스포츠 분야에서 전국을 열기로 몰아 넣었던 것은 서울에서 열린 세계 아마야구 선수권대회로서 마지막 일본 전에서 한대화 선수가 3점 홈런을 때려 역전승하며 우승한 것이었다. 한국은 대표 선수들을 82년에 프로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그것은 이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할 선수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해창, 장효조, 김재박 등의 선수들이 그 선수들이었다.

 

  1982년 당시 연세대학교는 야구에서 김문영, 박철영, 윤학길, 김영균, 장훈, 이순철, 김성래 등의 선수들이 활약을 하였으나, 고대의 선동렬 선수의 구위에 눌려 야구에서는 번번히 지곤 하였다. 그러나, 농구에서는 대학 최고의 슈터 김현준을 중심으로 이성훈, 오세웅, 고명화, 조명선 등이 활약을 하였고, 82년에 1학년으로 입학한 유재학 선수가 포인트가드로서 화려한 플레이를 보이며 맹활약하여 고대를 눌렀다. 축구에서는 국가대표 정해원, 변병주 선수가 활약하였으나, 이태호, 조극연 등 많은 국가대표를 보유한 고대에게 약간 밀리는 인상을 주었다.

 

  1982년의 Pop Song 분야에서는 유난히 감미로운 노래가 많이 선을 보였다. Hard to Say I’m Sorry, Love Me Tomorrow, Open Arms, Little Peace, Casablanca, Sea of Heartbreak, Midnight Blue 등의 감미로운 노래들과 Working for the Weekend, 9 to 5, El Dorado, Bad Case of Loving You 등의 빠르고 신나는 노래들이 선보였다.

 

  국내 대중음악 분야에서는 대마초로 활동이 정지되었다가 80년 ‘창밖의 여자’로 화려하게 컴백한 조용필이 ‘비련’, ‘고추잠자리’ 등으로 정상의 자리에 있었고, 81년 국풍81로 데뷔한 이용의 ‘잊혀진 계절’, ‘우리의 서울’, 78 해변가요제 출신의 두 팀이 합쳐진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 ‘빗물’ 등이 인기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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